두 달 동안 우리가 살아갈 집은 올레 18코스를 살짝 비켜간 곳에 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바다를 볼 수 있다. 창 밖으로는 바다가 아닌 우리집과 이웃집의 돌담이 보인다.
주말이면 동네를 구경하는 관광객이 늘어난다. 간혹 잠옷을 입고 집 안에 앉아 있는데, 돌담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집안을 살펴보거나, 카메라를 들고 집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볼 때면 흠칫 놀라곤 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보이면, 우린 구석에 숨어 그들을 지켜보며 말한다.
“안에 사람 있는데 사진을 찍네, 안 보이나?”
“밖에서 잘 안 보이면 다행이지 뭐.”
“당신, 머리 내밀지 마 사진에 빼꼼한 거 찍힐라.”
남편은 원래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까지 의식 안 할 줄은 몰랐다. 블라인드를 내리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낮에는 햇살을 집안으로 들여놓고 싶어 진다. 다행히 아주 붐비는 길은 아니어서 이런 경험이 자주 있지는 않다.
“아침 달리기 코스로 올레는 어때?”
제주에서도 평소처럼 아침은 달리기로 시작하려 했다. 남편의 제안에 우리는 달리기 코스를 찾기 위해 숙소에서 18코스의 끝부분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검은 돌담이 쌓인 마을길을 지났다. 제주의 길은 반듯하지 않다. 길은 제멋대로 자유롭게 뻗어나간다. 길이 있어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집을 짓다 보니 길이 생겨난 것이다. 같은 골목도 집이 자리 잡은 모양에 따라 넓기도, 좁기도 하다. 꼬불꼬불 제멋대로 뻗은 돌담 길은 제주와 어울렸다.
집의 형태도 다양하다. 제주 전통가옥과, 새로 지은 2층 주택, 80년대 유행했던 붉은 벽돌로 지은 구옥이 함께 뒤 섞여있다.
제주는 아직까지 전통가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집이 많았다. 제주 전통가옥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대부분 지붕은 새로 올렸다. 검은 돌집과 대비되는 주황색, 파란색의 화사한 지붕이 많다. 제주의 지붕은 새로 올려도 육지의 지붕과는 달랐다. 나지막이 내려앉은 지붕 아래로 돌담이 높게 쌓여 바람으로부터 집을 보호한다. 나지막이 내려앉은 지붕에 괜히 더 정감이 간다.
난 밖거리, 안거리로 나누어진 전통가옥의 형태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용도에 맞게 고쳐 지으면 좋을 것 같았다. 마을길을 산책하다 보면, 버려진 집도 간혹 보인다.
“제주도 전통가옥 사서 고쳐지어 살면 좋겠다.”
“싸우면 각방 써! 가 아니라 너네 집으로 가! 하면 되겠네.”
“한 채는 우리가 살고, 한 채는 카페를 하자.”
마을길을 산책할 때면 제주도 주택 로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요즘 같이 날씨가 좋은 봄날에는 제주에서 계속 살고 싶다가도, 혹독한 제주의 겨울을 떠올리면 고개를 젓게 된다.
18코스의 끝자락은 마을 길과 바닷길이 함께 있었다. 마을길을 걷다 보면 대섬으로 연결된다. 대섬과 육지를 잇는 바닷속 돌길은 달리기에 무리가 있었다. 우회할 마을길을 찾았다. 마을길을 돌아 나오면 연북정과 조천항을 따라 조천 만세동산까지 연결된다. 주로 평지고, 조천 만세동산까지는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길은 지루하지 않고, 힘들지 않아 보였다.
아침, 달리기를 시작한 지 6개월을 훌쩍 넘었는데도, 달리기 전은 긴장된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며 긴장을 풀어본다. 휴.. 한번 더 한숨을 내쉬고,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이제 시작할게.”
내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에서 ‘운동을 시작합니다.’라는 메시지가 울린다. 그렇게 남편과 한 걸음씩 달리기를 시작했다.
1km를 달릴 때마다 스마트 워치에서 1km당 평균 속도를 알려준다. 오늘은 평소보다 기록이 조금 늦다. 조금 더 속도를 내본다. 처음에는 달리다 힘이 들면 고개를 숙였다. 힘들수록 고개를 들고 몸에 힘을 빼야 좀 더 쉽게 달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건 며칠 되지 않는다.
이른 아침 올레길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숨이 찰 때마다 잠시 마스크를 내리고 탐욕스럽게 숨을 들여 마신다. 상쾌한 공기가 이렇게 달콤한 것이었던가! 마스크를 벗고 달리면 기록이 꽤 단축될 듯싶다.
늘 같은 길을 달린 지 이제 한 달이 되어간다. 매일 같은 길을 달리다 보면 달라지는 자연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있다. 메마른 가지 끝에 연두색 아기 같은 잎이 한두 개씩 돋아나더니 어느덧 나무 가지 가득 여린 잎들이 채워졌다.
제주에서 달리기는, 평소 달리던 거리보다 2km가 늘어났고, 1km당 평균 속도가 15초 정도 빨라졌다. 거리는 늘고, 기록은 단축되었는데, 달리고 난 후 몸은 훨씬 가볍다.
퇴사 전,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숨을 참았었다. 스트레스받는 일이 없으니 숨을 참는 횟수는 줄었으나, 아직도 긴장할 때면 숨을 참는다. 하지만 그 횟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제 나를 괴롭히던 두통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듯하다. 퇴사 후 7개월, 이제 몸이 정상을 찾아가고 있다.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할 때면 나를 공격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은 의미를 찾는다. 그냥 넘길 수 있는 말도 속으로 몇 번씩 곱씹고 괴로워했다. 회사에서 얻은 정신적 장애인데,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 명상을 시작했다. 현실에 집중하며 내 몸과 호흡에 집중하는 10분의 시간이 흐르면 머릿속이 깨끗이 씻겨 나간 듯한 기분이 든다. 감았던 눈을 뜨면 세상이 말갛게 보였다. 명상도 달리기처럼 꾸준히 하다 보면 몸의 변화처럼,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찾지 않을까 싶다.
은퇴 222일째 조금씩 건강해지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