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우리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by idle

추자도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 우리는 완도로 향했다. 그곳까지는 배로 3시간이 걸렸다. 해거름에 도착이라 무리해서 이동하지는 않았다. 완도에서 하루를 머문 이후, 목적지인 속초까지는 일주일 동안 여행하듯 길을 나서기로 했다. 우리는 살면서 한 번 스쳐 지나간 적도 없는 무주-문경-제천을 거쳐서 속초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다음날 어두워진 이후에야 무주에 도착했다. 우리는 덕유산 구천동 계곡에 미리 구해두었던 숙소로 향했다. 그곳은 어두운 도로를 한참이나 달려 산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창을 열면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곳이었다. 어린시절에는 이런 풍경을 보면 “어머 낭만적이야, 멋지다.”라는 생각부터 했는데, 나이가 든 지금은 “아, 여기 벌레 많겠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우리가 무주로 온 목적은 덕유산을 가기 위해서였다. 계곡을 둘러보고, 곤돌라를 타고 덕유산을 오르자고 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무주에 있던 내내 덕유산은 구름에 가려 어떤 모양의 봉우리를 가진 산인지 알아보지조차 못했다. 흐린 날 산을 오르고 싶지는 않아서, 우리는 별다른 걸 하지 않고 차로 동네 탐방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두 번째 목적지인 문경으로 이동하는 날, 하늘이 화창하게 개였다. 드디어 덕유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덕유산은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높은 산인만큼 크고 웅장했다. 그리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향적봉의 곡선은 부드러웠고, 덕유산 숲 속은 모든 것을 품어줄 것 같이 따스했다.


“이제야. 덕유산 봉우리를 보내. 아쉽다.”

“은퇴해서 시간 많잖아. 좋은 날을 골라 다시 오면 되지.”


이 곳을 다시 찾아오라고 아쉬움을 남겨주었나 보다. 은퇴 이후 우리에게 여유 있는 것은 시간뿐이니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무주를 떠나는 날 구천동 계곡을 따라 걸었다.


문경은 다행히 날이 맑았다. 이곳에서 우리는 문경새재길을 걷기로 했다. 문경새재는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갈 때 주로 넘었던 길이라 한다. 죽령으로 가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데 반해, 문경새재를 넘으면 말 그대로 경사를 전해 듣고 새처럼 비상하리라는 미신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문경새재를 걸으며 생각했다. “이건, 과거유람길인데?” 길이 새로 정비되어 그런 것도 있겠지만, 계곡을 따라 걷는 숲 속 길은 걷기 좋았고, 풍경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 하여 두려웠는데, 오르막은 가파르지 않고 완만했다. 1관문 주흘관에서 3관문 조령관까지 편도 6.5km, 왕복으로 13km의 길은 문경새재의 자연을 즐기다 보면 힘들지 않게 다녀올 수 있는 길이었다. 중간중간 휴게소도 여러 곳 마련되어 있어서 내키는 곳에 들어가 잠시 쉬어가도 된다.

문경새재길. 휴게소에서 두릅전에 막걸리를 마셨다.

문경새재를 떠나 마지막 목적지인 제천을 향했다. 다시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긴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더 이상 다닐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은퇴 후 게을러지지 말자고 다짐하며 부지런하게 살았었는데, 여기서는 거실에 누워 뒹굴거리기만 했다. 숙소의 바닥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블록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게 집 없는 설움인가?”

“왜?”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니까. 아무런 의욕이 안 생겨.”

“나도 그래, 괜히 우울해지네.”


제주도에서 두 달 동안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다. 우리 집이 그립지 않았고, 새로운 숙소에 맞는 리듬을 찾아서 규칙적인 생활을 했었다. 낯선 동네의 생활은 일상을 살면서도 새로운 기분이 들게 했고, 가끔 나들이를 할 때면 집에서 주말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여행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은퇴 전 우리는 늘 지금처럼 짧게 돌아다니는 여행만 해왔었다. 하지만 긴 여행에 익숙해진 우리는 짧은 여행이 불편해졌다. 곧 떠날 거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은 우리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당연하던 것이 우리를 힘들게 했다.


“그래도 곧 속초 가니까. 속초만 가면 괜찮아질 거야.”


속초에서는 다시 한 달을 보낼 예정이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 우리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제천 여행을 마무리한 이후 속초를 향해 떠났다.

청풍호와 제천 약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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