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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마몬 Oct 20. 2024

20 국민청원의 힘?


“허 교수, 일어나 봐요.”


까무룩 잠에 들었던 그를 흔들어 깨운 것은 교수였다. 허경일은 자신이 잠시 잠에 들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식은땀이 이마에 송글 송글 나 있었다. 교수는 허경일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벽면에 걸린 TV를 가리켰다. TV에는 뉴스가 아니라 인터넷 창이 보였다. 박희수. 그것은 박희수의 노트북 화면이었다. 어느새 노트북과 TV를 누가 연결한 모양이었다. [누명을 쓴 기억도난 사건 용의자를 석방해주세요.] TV에 게시 글 제목이 보였다.  


“저게 뭡니까?”

“박희수 학생이 올린 겁니다.”


박희수는 그대로 노트북에 얼굴을 고정한 채 퉁명스럽게 답했다.  


“어제 미리 써놨어요. 국민동의청원이에요.”


TV화면이 정신 사납게 깜빡거렸다. 박희수가 계속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고 있던 탓이었다. 교수는 허경일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 교수도 빨리 동의 버튼 눌러요. 지인이나 가족들한테도 보내시고.”

“저게 도움이 될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숫자가 제법 빠르게 올라가고 있어요.”


박희수가 스크롤을 내렸다. 화면엔 ‘동의 수 8589명’이라는 표기가 있었다.  


“올린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기자회견 끝나자마자 올렸어요. 3시간 반이네요. 지금 트위터랑 인스타그램이랑 인터넷 커뮤니티 중심으로 뿌리고 있어요. 그 바이럴 업체 아저씨한테도 뿌려달라고 요청했고요.”


허경일은 교수의 노트북으로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 접속하여 박희수가 올린 글을 찾았다. 이제는 8612명으로 미세하게 동의 숫자가 올라가있었다. 허경일은 빠르게 마우스로 스크롤을 내리며 내용을 파악했다. 사건을 무마하고 싶었던 경찰이 착하고 성실한 학생인 김재이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내용이었다.  


“수업시간에 성실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은데요.”


박희수가 말없이 허경일을 째려보았다. 허경일은 자신도 모르게 박희수의 눈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교수의 연구실에서 늦은 점심을 시켜서 먹고, 하루 종일 그 공간에 모여 있을 수 없는 이들이 한차례 각자의 일터나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청원의 동의 수는 올라갔다. 만 명이 넘고, 만 오천 명이 넘고, 급기야는 이만명이 넘었을 때에야 박희수는 노트북을 닫았다.  


“이제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본 것 같아요.”


처음으로 박희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박희수는 남들이 모두 식사를 하는 동안 방치되어 차갑게 식어버린 볶음밥의 포장지를 천천히 벗겨냈다. 박희수는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한 입 크게 퍼서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다시금 몇 가지 근심이 생각난 듯 모래를 씹고 있는 것처럼 인상을 쓰며 입을 우물거렸으나 이내 목구멍으로 볶음밥을 씹어 삼켰다.  


“괜찮을 겁니다.”


천천히 허경일이 박희수에게 말을 건넸다. 무엇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는지는 허경일도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 김재이의 신상인지, 자신의 미래인지, 빼앗거나 빼앗긴 기억들인지. 그럼에도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허경일은 한 번 더 생각했다. 박희수는 그 이야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다시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어!”


박희수가 볶음밥을 다 먹었을 때 쯤, 기자회견의 주역이었던 기자가 연구실 귀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에요?”

“구속영장, 기자 톡 방에 떴어요.”


박희수가 숟가락을 내팽개친 채 기자에게 달려갔다. 허경일도 잰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천천히 핸드폰을 들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메신저 어플이 핸드폰에 띄워져 있었다.       


[받) 기억 도난 사건 용의자 구속 영장 기각. 오늘 저녁 9시 석방 예정]       


“이거 진짜에요?”


박희수가 유심히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덩달아 허경일도 핸드폰 화면에 코를 박았다.  


“‘받’이라고 표현된 걸로 봐서 이 사람도 어디서 받아온 소식인 것 같아요. 좀 기다려보면 맞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박희수가 맥이 빠진 듯 기자 옆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기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급히 박희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각이에요. 기각. 우리가 이겼어요.”


기자가 핸드폰을 든 손을 휘휘 저었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자에게 모였다. “[속보] 기억 도난 사건 용의자 구속 영장 기각”법원 사진 한 장과 기사 제목만 있는 언론사 뉴스가 기자의 핸드폰에 띄워져 있었다. 허경일은 기자의 핸드폰을 낚아채 아무 내용 없는 기사를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 해 허경일은 곧바로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멀리서 박희수가 우는 지 웃는지 모를 표정을 지으며 함성을 지르다가 좁은 연구실을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해자 연대 회원 한 명 한 명 앞에서 고개를 꾸벅 꾸벅 숙였다.  


“교수님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감사해요.”


박희수가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을 보고 허경일이 천천히 일어났다. 무심결에 그가 박희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박희수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놓았다. 박희수의 체온이 허경일의 손에 묻어 흔적이 남았다. 허경일은 손가락을 꿈지락 거리다가 팔을 내려놓았다. 하나의 고비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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