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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마몬 Oct 20. 2024

19 급조된 기자회견


글씨만 박힌 플랜카드와 작은 엠프, 그리고 마이크가 기자회견의 유일한 준비물이었다. 허경일은 이런 초라한 준비물로 기자회견이 진행될 수 있을지 미심쩍었으나, 참여자 수만큼은 여타 유명 기자회견과 비슷해서 가슴을 쓸었다. 종로경찰서 앞은 피해자 연대 회원들 외에 수많은 기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있었다. 피해자 연대에 각양각색의 직업군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이 도움이 되었다. 수많은 기자들을 모은 공은 피해자 연대 소속인 잘나가는 중견 기자에게 돌아갔다.  


교수는 잠을 한 잠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눈이 붉었다. 모든 피해자 연대 회원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상황을 공유하고, 설득하는 몫을 떠안았던 탓이었다. 교수는 그래도 다가오는 허경일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선택과 옳은 선택 중에 옳은 선택을 하셨군요.”

“지금의 선택지가 옳은 선택이 맞을까요?”

“적어도 책임을 다하였으니까, 괜찮을 겁니다.”


아침에 거울도 보지 못하고 나온 허경일이지만 왜인지 자신의 눈도 교수의 눈만큼 붉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똑같이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했으니까. 허경일은 천천히 기자회견 플랜카드 뒤편에 가서 섰다. 플랜카드를 쥐고 있던 박희수가 허경일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의 눈도 새빨갛게 충혈 되어 있었다.  


“기자회견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윽고 교수가 큼 큼 하는 기침을 내뱉다가 입을 뗐다. 그가 양복 앞주머니에서 꼬깃거리는 종이를 펼친 채 글을 낭독하기 시작하는 모습이 허경일의 눈에 보였다. 교수는 피해자연대가 왜 이 아침부터 기자회견을 하게 되었는지 청중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억 도난 사건, 체포된 대학생,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온 허경일에 대한 이야기까지. 허경일은 기자회견이 어쩐지 꿈속의 일처럼 몽롱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이 아침의 소란이 꿈이 아닌 진실임을 보증하고 있었다.


허경일은 목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쉼 호흡을 했다. 쌓아왔던 모든 것을 손수 부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쉼 호흡을 해야 했고, 떨리는 몸을 가라앉혀야 했고,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는 거짓말도 해야 했으니까. 아직 서늘한 겨울의 마지막 바람에 서서히 머리가 또렷하게 맑아졌다. 괜찮을 거야. 허경일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교수가 종이에 쓰인 모든 글을 다 읽고 마이크를 허경일에게 넘겼다. 허경일은 천천히 마이크를 받은 채 잠시 마이크의 무게를 느꼈다. 그가 이때까지 들었던 것들 중 가장 무거운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교수처럼 양복 안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펼치고 입을 뗐다.  


“저는 허경일이라고 합니다. 체포된 대학생이 처음으로 능력을 사용한 대상입니다. 오늘은 저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두 소상히 밝히고, 학생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잠시 허경일이 마이크를 가슴 아래로 내렸다. 숨이 좀 가쁜 것 같았기에. 평생 말하는 직업만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입을 떼기가 조금 어려웠다. 시야 바깥에서 박희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허경일은 조금 알 것 같았다. 허경일은 다시 마이크를 입 바로 아래에 가져다 댔다. 말하기 어려울 지라도, 말을 안 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허경일은 그것을 닦아내야 했다.       


*       


허경일의 기자회견은 종료 직후 포털 검색어와 sns 검색어 1위에 나란히 등재되었다. 이슈도 이슈였지만 바이럴 광고 업체에서 일하는 피해자 연대 회원이 열심히 기자회견 영상을 퍼트린 덕도 보았다. 차마 사람들이 무어라 떠들어대는지 볼 용기가 없었던 허경일은 잠시 핸드폰 전원을 껐다. 어쨌든 그의 이야기는 소상의 목적을 달성했다. 허경일에 대한 것만큼이나 김재이의 행동에 대한 갑론을박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특히 이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기에 가해자가 되어버린 사람들 머리에는 외면해왔던 불쾌한 사실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김재이가 정말 이 일의 원흉이 맞을까? 그 질문을 곱씹다보면 자연히 다음 질문도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김재이에게 모든 잘못을 떠넘기고 면죄부를 얻은 것은 아닐까? 간단한 질문이 주는 불쾌한 감각이 사람들의 뒷머리를 잡았다.


허경일을 비난하기에는 무고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허경일이 책임이 있다면 이제 흔하디 흔해진 능력 보유자들 전원이 책임이 있었다. 우연히 능력을 사용했던 김재이의 잘못은 정말로 다른 사람들보다 크지 않을 수 있었다. 심지어 허경일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김재이는 인터넷에 글을 쓰고, 기억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고,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만약 김재이의 잘못이 크더라도, 허경일의 말처럼 능력의 최초 발현자인 김재이를 체포하여 처벌하는 것으로 이 일을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김재이가 긴급 체포된 이후에도 누군가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흔들고 있을 것이므로. 정말 이 모든 일은 기억 도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눈속임일지도 몰랐다.  


“구속 영장이 통과될까요?”


박희수가 내내 노트북으로 무엇인가를 타이핑하다가 멈추고 물었다. 박희수의 시선 끝에 놓인 교수는 낮은 한숨을 쉬고 벽면에 걸린 TV로 눈을 돌렸다. 뉴스 속보들이 줄기차게 나오고 있었지만, 구속영장실질심사 판결이 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피해자 연대 회원 몇 명과 박희수, 허경일은 교수의 연구실에 앉아 모두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런 일에 휘말린 건지 모르겠어요.”


박희수가 대답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히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희수보다 못해도 15살, 20살씩 나이든 사람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휘휘 젓다가 다시 내려놨다. 허경일은 이 모든 소란을 보며 눈이 침침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한 숨도 자지 못한 탓인지, 이 모든 일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써서 그런지 미루어두었던 졸음이 허경일의 이성을 마비하고 있었다. 잠들면 안 돼. 허경일은 조용히 입모양으로만 그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어느 새인가 그의 정신은 저 멀리 허경일이 가닿을 수 없는 곳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꿈속의 허경일은 자신의 아이와 함께 있었다. 놀이공원에서였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건 따위 없었던 것처럼 허경일은 아이를 목마를 태운 채 빙글빙글 돌았다. 아이가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이내 허경일은 아이를 머리 위에서 내려놓고 두 팔로 안아 들었다. 우리 규진이. 허경일은 두 팔로 안은 아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자지러지게 웃었던 것이 거짓말인 듯 다시 잔뜩 뻣뻣한 얼굴을 하고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경일이 마구 소리를 지른 그 날의 풍경을 영원히 기억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허경일의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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