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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마몬 Oct 19. 2024

18 허경일의 선택


“이 능력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찻잎이 모든 향을 쏟아냈을 때 쯤 허경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체포된 대학생이 제 수업을 듣던 학생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그 학생의 친구가 저를 찾아와서 잡혀간 친구를 변호해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잡혀간 학생이 능력을 사용한 대상은 저와 저를 찾아온 그 학생뿐이라 하더군요.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찾아온 학생에게는 기억을 돌려줬다고 했습니다.”

“허교수에게는 학생이 기억을 돌려주지 않았나보군요.”

“시도했습니다. 실패했지만요.”


허경일이 조금 뜸을 드리다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쎄요.”


교수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창가 바깥을 보고 섰다. 그는 한참이나 허경일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학생이 가엽군요.”


느리게 교수가 웅얼거렸다. 혼잣말이기에는 너무 선명했고, 허경일에게 한 말이라기에는 혼탁한 목소리였다.  


“선택은 허교수의 몫입니다.”

“그렇죠.”

“허교수의 잘못만은 아니지만,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맞습니다.”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각자의 책임을 다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겠지요.”

“…….”

“학생은 기억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으니 말입니다.”


교수는 다시 뒤를 돌아 허경일에게 다가왔다. 어두컴컴한 하늘이 교수의 등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교수는 허경일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가 놓았다.  


“이제 돌아가시죠.”


허경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겉옷과 목도리를 챙긴 후 허경일은 천천히 연구실 바깥으로 발을 옮겼다. 아주 느리게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꺼진 복도의 어두움과 정적만이 남았을 뿐. 허경일은 긴장을 풀기 위해 어깨를 있는 힘껏 들었다가 내렸다.  


어떻게 해야할까.  


허경일은 모든 것이 발각되었을 경우를 상상해보기 위해 노력했다. 아마도 허경일은 수많은 적을 만들 것이다. 부도덕한 지식인을 비난하는 일에 취미가 있는 이들은 많으니까. 어쩌면 지금 강의하는 학교에서도 쫓겨날지도 몰랐다. 정교수가 되는 꿈은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 것이며, 운 좋게 강단에 계속 서게 되더라도 학생들 중에 누군가는 수군거릴 것이다. 능력을 사용하기 전보다 못한 처지로 추락할 것이란 점은 뻔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탑승한 이후에도 허경일은 똑같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모든 것을 밝힐 것인지, 아니면 숨길 것인지.  


“기억 절도 사건의 용의자가 자신이 능력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맞다고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용의자는 동시에, 이 모든 사태를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뉴스 속보가 버스에 설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허경일은 서둘러 들으면 안 되는 것을 들은 사람처럼 이어폰을 꼈다. 하루 종일 뉴스에는 김재이에 대한 이야기만 나왔다. 김재이 김재이 김재이. 김재이라는 이름은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 모든 소식이 김재이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김재이. 허경일은 비로소 김재이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항상 수업에서 졸거나 딴 짓을 하지만 매 학기 꾸역꾸역 허경일의 수업을 하나 정도는 선택해 듣던 학생. 공부는 못하지만 결석은 하지 않던 학생. 지식을 빼앗아버리고 싶다는 발칙한 상상을 고민하고 실현했지만, 곧 그 사실을 밝힌 후 지식을 돌려주고자 노력한 학생. 허경일은 불행히도 아침 뉴스 속보를 듣자마자 그 김재이가 오늘 수업에 불참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버스에 함께 탄 학생 몇 명이 키득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필히 김재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어쩐지 허경일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이 않아 필요 이상으로 세게 이를 악물었다. 허경일은 그 학생들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인 후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허경일은 저녁밥을 먹는 것도 잊은 채 내내 생각에 잠겨있었다. 한 손으로 잠든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아이의 등을 쓸며 김재이를 떠올렸다.


김재이가 겪고 있을 고충에 대해 생각하자 점점 보랏빛의 불안감이 발끝에서 심장으로, 머리로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인가를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박희수의 제안은 간단했지만,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재이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아마도 이대로라면 김재이는 더 많은 인생의 조각들을 잃어버릴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잃어버린 것을 늦게 떠올려본 것처럼 허경일은 천천히 김재이가 잃어버린 것들과 잃어버릴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허경일은 김재이를 생각하며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잠에서 깨지 않은 채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깨어있을 때 허경일이 볼 수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이의 가슴이 숨 때문에 가뿐히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던 허경일은 다시 서재로 향했다. 어느새 시간은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26시간 쯤. 김재이에게 남은 시간은 그 정도일 것이었다.  


허경일은 서재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미 헤어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허경일은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거는 것이 실례라는 것을 모를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도 김재이에게도 시간이 별로 없었다. 교수는 수화 음이 몇 번 울리기 무섭게 전화를 받았다.  


“이번엔 피해자 연대와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허경일의 입에서 한숨인지 쉼호흡일지 모를 가느다란 숨이 빠져나왔다.  


“내일 아침, 기자회견을 하고 싶습니다.”


수화기 맞은편에서 교수가 허허 웃는 소리가 허경일의 귀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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