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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마몬 Oct 17. 2024

16 내 아이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도어락 비밀번호를 치기 전 허경일은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20대 여성 대학생이 이 모든 사건의 주범으로 체포되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 허경일은 체포된 사람이 김재이가 아니길 기도했다. 김재이도 누군가에게 능력을 받았을 것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김재이로부터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것이 맞았다. 그조차 그렇게 된 이유를 모르는 듯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누구에게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지식을 교환하는 능력을 터득해버렸다.  


이 모든 일이 김재이의 탓인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허경일을 찾아온 박희수는 이 모든 일의 책임에 허경일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다. 이때까지 해온 것들이 모두 도둑질이 맞다면, 박희수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 능력이 그저 도둑질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면 이 모든 일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허경일이 악수를 나눈 교수들 중에 누군가는 또 다른 사람과 악수를 나눴을 것이다.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과 악수를 나눴을 것이다. 박희수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지식인이 아니라 남의 지식을 훔치는 도둑놈들일 뿐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조금씩 책임이 있는 문제에서 분명 김재이 한 사람만 처벌받는 것은 부당했지만, 허경일 그 자신이 유일하게 그 짐을 나눠가져야 하는지도 불명확했다. 단지 김재이, 그 학생과 악수를 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만으로.  


이윽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허경일은 열린 문 가까이로 아이가 쭈뼛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아빠” 


아이의 목소리가 잔뜩 기어들어갔다. 마치 아빠가 아니라 무서운 낯선 아저씨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것처럼. 허경일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 눈에 힘을 주었다.  


“아빠한테 더 크게 인사해야지.” 


아이의 꽁무니를 쫓아온 아내가 아이 옆에 쪼그려 앉아 귓속말을 했다. 아내의 손이 슬로우 모션 동작처럼 천천히 아이의 등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조그만 등을 구부렸다.  


“아빠,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발음이 숭숭 새는 아이의 인사를 듣다가 허경일은 아내처럼 쪼그려 앉아 아이를 들어 올려 안았다. 아이의 몸은 숨을 참고 있는 듯 온통 뻣뻣했다. 부드럽고 말랑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토막을 안고 있는 것처럼. 허경일은 아이의 등을 쓸어주다가 아이의 작은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날, 허경일은 아이를 지나쳐 곧바로 서재에 향했다. 자신이 드디어 어떤 기억을 잃었는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조그만 아이에 대한 기억. 그 아이가 필시 자신의 아이일 것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아이는 필시 허경일에게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 뻔했다. 자신에 다리에 뺨을 부비는 아이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아이였으니까. 허경일은 자식을 기억하지 못하는 애비가 되어버렸다.


그는 그의 인생에서 어쩌면 너무나 소중했던 것에 대한 기억이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어느새 그 소중한 것은 허경일의 인생에서 하등 쓸모없는 감자탕집의 레시피와 바뀌어 버렸다. 그 생각까지 이르자 허경일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그것은 마치, 인생을 도둑맞는 것과 같은 일이었기에.  


허경일은 서재의 책상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챌 수도 없었다. 분노에 뇌가 마비된 채, 허경일은 이 능력과 자신의 기억을 빼앗은 걸인과, 자기 자신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허경일은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는 허경일이 서재에서 소리를 지른 날부터 늘 뻣뻣하게 허경일에게 안겼다. 허경일은 뻣뻣한 아이를 안고, 그래도 아이의 온기와 심장 소리, 아이를 사랑했던 시간을 기억해보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아이와 함께 피크닉을 갔던 날이 있었겠지. 뒤집기를 보고, 처음 걸음마를 볼 때 울컥했을 때도 있었겠지. 아이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도, 아이가 울음을 그치지 않아 답답했던 때도 있었겠지.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안고 있는 아이가 허경일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아이가 자신이 한 때 사랑했던 존재였던 것이 사실일까? 걸음마를 보던 기억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 아이와 함께 울고 웃었던 기억들은 모두 허경일의 망상 속에만 존재하는 일이 되었다.  


허경일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아이를 다시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종종걸음으로 아내에게 달려가 안아달라는 듯 두 손을 뻗었다. 허경일은 아내가 서글프게 미소를 짓다 아이를 안아 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내는 허경일을 보고 억지로 웃어 보인 후 방으로 사라졌다. 허경일도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서재로 향했다. 문득 해야 할 것이 허경일의 머리에 스쳤다.  


허경일은 서재로 들어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노트북을 켰다. 교수의 메일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교수가 TV에 인생네것 피해자 연대 대표로 발언할 때마다 허경일은 채널을 돌려버렸었다. 그럼에도 교수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았다. 허경일은 교수 메일 하단에 쓰여 있는 연락처를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천천히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 눌렀다. 교수의 번호에 지정해놓은 수신차단을 풀고, 허경일은 느리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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