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일과 박희수는 경찰서 문 앞에서 초조하게 김재이를 기다렸다. 몇몇 기자들이 그들과 함께 경찰서 문 앞에서 스텐바이를 하고 있었다. 초조한 감각이 다시금 허경일의 몸을 감쌌다. 허경일도, 박희수도, 교수도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긴 하루를 보낸 참이었다. 경찰서의 불빛이 새까만 밤을 몰아내며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김재이가 마침내 경찰서 바깥을 나간 것은 밤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박희수와 허경일은 김재이의 그림자가 김재이보다 먼저 경찰서 문을 빠져나오자마자 튀어나갔다.
모자와 마스크를 푹 눌러쓴 김재이 옆에 서 있던 경찰들이 허경일의 얼굴을 보고 주춤 하고 물러섰다. 허경일은 그 잠깐의 순간 동안 서둘러 김재이의 얼굴을 옷가지로 가렸다. 옷가지에 머리가 덮이는 순간 둥그렇게 뜬 김재이의 눈이 박희수의 뺨을 스쳤다. 허경일과 박희수는 김재이의 양 팔에 팔짱을 낀 채 김재이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달리기 시작했다. 펑 하고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그들의 뒤 꽁무니를 쫓았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교수가 승용차에서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펑 하는 플래시 소리 사이로 가늘게 찢어졌다. 박희수는 재빠르게 승용차 뒷문을 열고 김재이를 밀어 넣었다. 허경일까지 모두 승용차에 탑승한 후, 교수는 곧바로 엑셀을 밟았다.
허경일은 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송글 거리는 땀을 대충 손등으로 훔친 채 김재이의 머리에 대충 덮인 자신의 자켓을 내려주었다. 김재이의 둥그런 눈이 다시 한 번 박희수의 뺨에 스쳤다가 허경일의 눈에 가닿았다.
“미안합니다. 뉴스에 얼굴이 나오면 곤란해질까 봐.”
김재이는 말없이 허경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박희수가 손을 들어 김재이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나란히 둘이 손을 맞잡는 것이 허경일의 눈에 보였다. 김재이는 아직까지 두렵고 주눅이든 듯,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허경일은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입을 닫았다. 어떠한 말도 지금의 김재이에게 닿을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유치장에서 기자회견을 봤어요. 국민동의청원에 대한 뉴스도요.”
한참이 지난 후, 김재이가 느리게 입을 뗐다.
“다들 감사해요. 사실 좀 무서웠거든요.”
“그럴만 하지요.”
“맞아요.”
“고생했어요.”
허경일은 애써 미소를 짓기 위해 애를 썼다. 김재이가 한 번 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숙였다. 청바지에 물방울 몇 개가 떨어졌다. 박희수가 말없이 손을 뻗어 김재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봤겠지만, 피해자 연대를 하고 있는 천준호 교수입니다.”
운전석에 앉은 교수가 입을 뗐다.
“집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걱정 말고 쉬어요.”
김재이가 조용히 네. 하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허경일은 웅얼거리는 김재이를 보고 하지 않은 말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남의 지식 같은 것을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김재이가 고개를 다시 들어 축축해진 눈으로 허경일을 바라보았다. 그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김재이가 웃었다.
“마찬가지예요.”
무어라 말릴 틈도 없이, 김재이는 손을 뻗어 허경일의 눈앞에 내밀었다.
“돌려주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허경일은 김재이처럼 미소를 살짝 지은 다음 가볍게 김재이의 손을 잡았다. 김재이의 작은 손가락이 허경일의 손바닥 안쪽에서 꾸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가볍게 손을 흔든 후 다시 손을 놓았다.
그 순간, 허경일의 머릿속으로 무엇인가가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감벤. 호모 사케르. 권력. 관리와 통제. 코로나. 마스크. 몇 가지 이탈리아 말로 쓰인 저서들. 허경일은 그것이 첫 번째 능력이 발현되었을 때 자신이 빼앗긴 지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수업시간에 우두커니 서서 허공을 바라보게 했던 그 지식들이었다. 허경일은 호모 사케르와 아감벤 생각을 하며 크게 웃었다. 이 모든 일이 이 시원찮은 지식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니. 왜인지 그 하등 무가치한 지식이 쏟아지는 동안 허경일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식을 빼앗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해도 작동하네요.”
김재이가 천천히 웃고 있는 허경일을 보며 우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