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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마몬 Oct 23. 2024

22 이웃을 위한 선한 책임


어느 순간 재이에게 이상한 능력이 생겼던 것처럼, 어느 순간 재이의 능력은 자취를 감추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잠시 흔들었다가 놓는 행위만으로 타인의 기억을 훔칠 수 있는 간편한 사회의 시즌이 종료되었다. 아마도 그 시기는 재이와 시간강사가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눈 시기와 동일했을 것이다.  


재이가 그 능력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조금 변형되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희수가 오래간만에 윤슬이를 만나 악수를 했기 때문에 재이는 그 사실을 겨우 알았다. 덕분에 희수는 코나투스에 대한 지식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빼앗은 지식을 돌려주는 것은 아직 가능할지도 몰라.” 


희수는 재이와 자취방 침대에 누워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재이는 그 말이 시즌 2의 예고편처럼 느껴져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희수는 몸을 부르르 떠는 재이를 바라보다가 재이의 가슴에 손을 대고 토닥 토닥 두드렸다.  


“괜찮을 거야.” 


희수의 손이 재이의 가슴에 따뜻한 감각을 남겼다. 천천히 재이는 희수가 누워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희수의 짧은 머리와 살짝 찌그러진 뺨이 재이의 눈에 보였다. 재이는 희수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에 조금 위안을 얻어 살짝 웃어보였다.     


세상 사람들은 재이와 희수처럼 천천히 시즌 2의 시작을 깨달아갔다. 재이와 희수의 이야기를 들은 교수가 피해자 연대 명의로 한 번 더 기자회견을 개최했기 때문에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곧이어, 정부는 우연히 얻게 된 기억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은 사람들과 기억을 되돌려 받고 싶은 사람들을 접수받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뻔 한 일이었지만, 드디어 그들도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막연하게나마 이해한 듯 보였다.


이 사업에 가장 먼저 참여한 사람은 대통령과 시장 상인이었다. 정부는 그들의 악수를 생중계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대통령과 시장 상인은 딱딱한 브리핑 룸이 아니라 토요일 저녁, 가장 인기 있는 공영방송 토크쇼 패널로 참석했다. 따뜻한 말투 덕분에 큰 인기를 끈 국민 MC가 둘 사이에 앉아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정순자 선생님의 기억을 곱씹어 볼때면, 제가 우연히도 정순자 선생님의 아주 소중한 기억을 가져가버린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지금이라도 꼭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대통령은 이 사업에 참여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담담하게 답했다. 같은 질문에 시장 상인은 “죄책감 때문입니다.”라고 짧게 설명했다. 세간에서는 떡볶이를 팔았던 세월과 대통령의 정치 인생 중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더 귀중하다고 판단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과 SNS에서는 시장 상인의 바보 같은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로 넘쳐났다. 행운을 자기 스스로 발로 차버린 사람. 시장 상인의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 모든 비난과 의견들을 깔끔히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은 두 당사자는 기꺼이 생중계 카메라 앞에 앉았다. 어쩐지 둘 다 조금은 후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모두 상대방의 귀중한 인생을 실수로 훔쳐버린 사람처럼 머뭇거리면서.


대통령과 시장 상인은 곧이어 서로를 마주본 채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손을 마주 잡았다. 이윽고 손을 뗀 후에 그들은 멍하니 각자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잠시 잃어버렸던 것들을 문득 기억해낸 사람들처럼. 조용히 시장 상인이 꽃무늬 손수건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닦는 모습이 생중계 되었다.


대통령과 시장 상인의 토크쇼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정부의 사업에 참여했다. 정부는 기억을 돌려주고 싶은 쪽과 기억을 잃어버린 쪽 모두의 신상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다.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가림 막과 음성 변조 기능 등이 동원되었다. 사람들은 가림 막에 있는 동그란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고, 마찬가지로 구멍에 손을 넣은 상대방의 손을 잡았다가 살짝 흔드는 일을 반복했다. 재이와 희수는 가끔 자취방에서 TV를 보다 허경일의 얼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대대적인 홍보가 이루어진 정부 사업의 홍보 대사를 허경일이 맡게 되었던 까닭이었다.


“우리 곁을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선한 책임을 실현해 주십시오.” 


광고에서 시간강사는 그렇게 말하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너무 긴장한 탓에 눈은 전혀 웃지 않은 채로 입꼬리만 올린 표정이었다. 재이는 어쩐지 그 표정이 마음에 들어 그 홍보 영상을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해서 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제자리를 찾은 지식들은 무가치하게 평가되는 지식들이었다. 그것은 조기축구에서 반칙을 하는 방법이나, 베이킹을 하는 방법, 대학생들이 답안지에 쓴 바보 같은 답변 따위의 것들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절실하고, 기억을 훔친 사람에게는 하등 가치가 없는 지식도 빠르게 교환 되었다. 첫사랑을 아프게 했던 기억과 그와 보낸 추억들, 아이와 첫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아이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사진을 찍었던 기억들이 그런 것들이었다. 홍보대사로서 기억을 되찾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가림 막 앞에 선 시간강사는 잔뜩 긴장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윽고 시간강사의 손과 얼굴이 가려진 사람의 손이 부드럽게 맞붙었다가 떨어졌을 때 허경일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카메라가 본인을 찍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허경일은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의 무릎에서 엉엉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그는 함께 온 아내에게서 작은 아이를 건네받아 안고 아이의 작은 등에 기대 소리 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대통령과 시장 상인의 악수만큼이나 상징적인 모습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구청과 주민 센터로 발을 돌리게 만들었다.  


홉스에 대한 지식이, 데카르트에 대한 지식이, 아주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시간이, 아이에 대한 마음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이 천천히 물밀듯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돌아왔다. 그 기억들은 모두 잠시 잊고 있었지만, 모두 그들의 것이었던 기억들이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고통에 대한 기억을 다시 돌려받아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떠한 누구도 다시 한 번 악수를 하는 일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았다.


국회는 곧 악수 금지법의 폐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악수 금지법을 폐지할 때보다 배로 치열한 공방 끝에 대통령의 하야 결정 번복을 승인했다. 대통령의 기억을 뺏었던 떡볶이집 상인은 <대통령도 반했던 그 떡볶이>라는 슬로건으로 장사를 다시 시작하여 대박이 났다. 대통령은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한 날 첫 일정으로 그 떡볶이 집을 방문했다. 대통령은 기억을 잃기 전과 마찬가지로 떡볶이를 한 입 문 채 상인과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시간강사의 최근 논문의 대부분은 학회지에서 내려갔다. 그는 누군가에게 비난의 대상이, 누군가에겐 이 모든 일을 해결한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나 곧 그가 홍보대사로 크게 활약했기에 비난의 목소리는 금방 잠잠해졌다. 그는 다시 학생들에게 시험 성적표를 나눠주며 악수를 하고, 존댓말을 사용하는 이상한 시간강사로 돌아갔다. 비슷한 시기, 김재이의 사건은 불기소 처분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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