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중에는 인상 깊고 강렬하지만 해마다 반복할 수 있거나 여러번 도전해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살면서 딱 한번 밖에는 해볼 수 없는 경험이 있다.
내가 경험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아보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에는 다시는 못해볼 경험을 꺼내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자존감을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던 쌍둥이 자연분만의 그날 이야기이다.
쌍둥이를 임신하자마자 자연분만과 제왕절개 사이에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해보지 않고 후회하기보다는 시도해보고 실패하더라도 한 번쯤 해봐야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던 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렇게 도전했던 재수와 편입에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바 있기에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자연분만을 결정할 수 있었다.
문제는 병원이었다. 지금은 좀 높아졌을지 모르겠으나, 당시 쌍둥이 자연분만의 성공률은 8% 정도였다. 절반의 성공은커녕 10%도 되지 않는 위험부담 때문인지 자연분만을 하고 싶어도 자연분만을 도와줄 수 있는 의사를 갖춘 병원이 몇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난임 카페를 뒤지고 뒤져서 자연분만이 가능하신 의사선생님과 병원을 찾아냈다.
코 앞에 산부인과를 놔두고 차로 30분 이상 가야하는 병원을 다녀야했다. 심지어 담당선생님은 산부인과의 두 지점을 교차로 진료해주시는 분이라 월요일이나 수요일이 아니면 분만을 못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뱃속의 둥이들도 비협조적이었다. 쌍둥이를 자연분만하려면 두 아이들의 머리가 둘 다 아래로 향해있는 66자세여야 하는데, 이 녀석들이 방향을 바꿔 69자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임신 30주를 막 넘길 무렵 자궁문이 조금 열렸다면서 조심하지 않으면 조산할 수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더해졌다. 어쩔 수 없이 하루종일 누워서 몸을 사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시댁의 쇼파에 누워서 차려주시는 밥을 얻어먹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는 사이 출산이 다가오고 있었다.
쌍둥이 자연분만이 가능한 의사선생님의 일정에 맞추어 유도분만일이 잡혔지만, 내 맘처럼 되지 않았다. 결국 하루를 병원에서 묵고 다음날 다시 둥이들을 만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흔하지 않은 케이스라서인지 온 병원 의사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아마도 산부인과 의사들에 소아과 의사들까지 몰려온 듯 했다. 생각해보면 사전에 나한테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넓은 가족분만실이 의사들로 빽빽했다.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고 첫 아이가 나왔을 때, 남편은 감격에 겨워하며 아이의 탯줄을 직접 잘랐다.
그리고 둘째 아이가 나오는가 싶더니 문제가 있다며 도로 밀어넣었다, 오마이갓!!!! 그렇게 나오던 아이의 몸을 다시 넣었다 빼는 어마무시한 일이 일어난 덕에 두 아이의 시간차가 8분이 되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나는 대한민국 8% 사람이 되었다. 8%의 낮은 성공률에 도전하여 결국 해내고야 만 사람이 된 것이다. 쌍둥이를 가진 부모의 확률에 자연분만을 시도한 확률에 성공한 확률까지 계산해본다면 나는 대한민국 1%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 날의 경험은 나를 자존감 뿜뿜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바이킹도 못 탈 만큼 겁많은 쫄보지만, 과감하게 도전하여 성공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쌍둥이를 자연분만하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을거라고 생각하며 버텨낼 수 있는 강인함을 장착하게 되었다.
누군가 출산을 코구멍으로 수박을 빼내는 고통이라고 표현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고통이 있었겠지만, 힘들었던 그 시간들보다는 무사히 아이들이 나왔음을 확인한 그 순간이 더 강렬하고 기뻤다.
살면서 출산을 여러 번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쌍둥이를 자연분만하는 기회와 성공한 경험은 누구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출산의 고통은 두 배 이상이겠지만, 쌍둥이를 만나 느끼는 행복도 두 배 이상이다. 하고 싶어도 다시는 못하는 인생의 단 한 번뿐인 그날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