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는 나의 힘
10년 전, 직장 상사가 고사성어 적자생존(適者生存)으로 썰렁한 농담을 날렸다.
"적자(write), 그러면 살아남을 것입니다." '
지루한 회의시간을 조금이나마 유쾌하게 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요즘따라 적는 것의 힘을 체감하고 있어서일까.
바버라 베이그는 그의 저서 <하버드 글쓰기 강의>에서 창조적 기능을 일깨워 주는 훈련으로 프리라이팅(free writing)을 제시한다. 프리 라이팅 기법의 핵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적어도 10분 동안은 펜으로 무언가를 쓰는 것이다. 이때 뇌의 자유로운 사고가 아무런 제약 없이, 무한대로 펼쳐지도록 시계를 보지 않아야 한다. 시계를 보고 무의식 중에 '이제 몇 분 남았군'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핸드폰 스톱워치 기능을 이용해서 10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도록 쓰는 것에만 집중해 본다. 자신이 적은 것에 밑줄을 긋거나 편집해서도 안되며, 똑같은 단어나 문장을 반복하더라도 계속 쓰는 것이다.
처음 이 기법을 책에서 접했을 때, '이런 것이 있구나.' 하고 넘겼다. 독서 도중 다른 무엇인가를 시도해 보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연체된 이 책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프리라이팅이라는 단어가 거슬릴 정도로 책의 뒷부분에까지 계속 나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것을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읽었다고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책을 읽고 있는 당장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저녁 시간이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는 분위기여서 조용한 때를 기다렸다.
다음날 오전, 마침 브런치에 쓸 거리도 없었다. 기대 없이 새로운 시도나 해 보자는 심정으로 볼펜을 들고 수첩 맨 위에 '12/21 free writing'이라 쓴 후 핸드폰의 타이머 기능을 10분으로 맞췄다. 쓸 거리가 있을까 하고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펜이 저절로 움직여졌다. 내가 쓴 것을 아무도 보지 않고, 쓸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편한 환경이었다. 나만 보는 것이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맞지 않고 문맥이 어색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 작업이 귀찮고 고생스러워도 10분만 있으면 멈출 수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었다.
프리라이팅은 '10분'이라는 짧은 시간과 여기에 들어가는 에너지에 비하면 얻는 것이 많은 활동이었다. 물건으로 비유하자면 가성비가 뛰어나달까. 쓰고 싶은 글감이 내 어림짐작보다 많았다. 무의식과 의식 속 어딘가 자리하고 있는 생각이 단어와 문장으로 탈바꿈하여 글감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직 쓸 거리가 많이 남아있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자칫 흘려보낼 수 있었던 상념을 붙잡아 유용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다. <강원국의 글쓰기>의 저자 강원국 작가는 '무의식의 세계는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 내 안에 쓸거리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기법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시도해보고 싶은 훈련 한 가지가 더 있다. 동일 저서에서 소개된 '관찰하기'이다. 프리라이팅이 내부의 생각을 모으는 내부 모으기라면, 관찰하기는 주변의 바깥세계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20분 정도 앉아있을 만한 카페나 공원 벤치에 앉아 탐험여행을 하듯 관찰한 바를 기록하는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활용하여 세부적인 것을 수집한다. 동시에 공공장소에서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관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단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시도부터 해 보고, 습작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느껴지면 저절로 하게 될 것이다.
이 밖에도 소설에서 발견한 기막힌 묘사 기법, 수필에서 찾은 통찰을 주는 문구들, 계발서에 쓰인 도움이 될 만한 문장들을 필사한다. 요리를 하다가 국물이 끓기를 기다릴 때 수첩을 뒤적여보기도 하고, 글을 쓸 때에도 인용할 것이 없나 수첩을 살펴본다. 수첩은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 목록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점점 늙어갈 것이고, 나의 두뇌 사용능력은 점점 쇠퇴할 것이다. 머리만 믿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손과 필기도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