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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살 딸을 위한 아빠의 헌신

by 아이두

방학이다.

고로, 엄마와 자식 간의 고된 장기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장기전을 대비해 엄마는 방학 일정표를 세웠고, 방학의 반가운 손님인 'EBS 방학생활'을 빼 놓을 수 없었다. 지금도 EBS 초등 사이트에 접속하면 전편을 다시 보기 할 수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방학생활 시청을 위해 텔레비전을 틀고 있을 찰나였다.

"얘들아, 어서 나와서 EBS 시청하자.~"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당연히 방에서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울음소리만 들린다. 우리 집에서 울음소리는 어느 정도 흔한 소리니까 그러려니 했다. 둘이 투닥투닥거리거나 어디 부딪히고 우는 소리겠지. 그런데 울면서 방을 나오는 첫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공포와 충격이 겹겹이 쌓인, 그로 인해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싸한 느낌으로 어디냐 물어보니 머리를 가리킨다. 만졌는데 축축했다. 손을 떼서 보니 그것은 피였다. 피는 나의 강박증과 관련된 대상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 피를 보는 순간 나도 덩달아 무서웠고 다음이 생각 나지 않았다. 피가 나는 부위를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가슴이 쿵쾅대고 제멋대로 나뒹굴었다.


바로 신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강준이가 머리를 박았는데 피가 나. 찢어진 것 같아."

"뭐? 일단 전화 끊고, 응급실 불러서 병원 가."

"알았어."


전화를 끊고 119를 눌렀다.

"여보세요? oo동 구급대입니다."

"네, 여기 (주소) 인데요.. 아이가 침대에서 발을 헛디뎌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거든요, 그래서 머리에서 피가 나요."

구급대원은 자세한 아이의 상태를 묻고, 자세한 주소를 묻더니 수 분 내에 도착할 것이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셨다. 아이의 머리에서 나는 피를 어찌할 줄 모르며 상처부위로 짐작되는 곳을 거즈로 지혈했다. 자꾸 나오는 피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다. 빨리 나의 구세주가 와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구급차를 타고 가더라도, 둘째는 어떻게 해야 하나? 혼자 집에 있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3층 위의 둥이들 친구네가 떠올랐다. 지금은 체면이고 뭐고 다급함이 1순위인 법.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를 걸어 용건을 말한다.


" 여보세요?"

" 언니, 저 죄송하지만, 강준이가 지금 침대 모서리에 부딪혀 머리에서 피가 나서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은데, 이준이 좀 잠시 올라가 있어도 될까요? "

"네, 그럼요. 올라오라고 해요."

이웃사촌의 소중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재빨리 둘째를 윗집에 보낸다.

" 엄마, 강준아, 하트 뿅뿅! "

" 그래, 엄마랑 강준이 병원 갔다 올 동안 아주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그렇게 둘째를 윗집으로 보내고 구급차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생각엔 하염없이 첫째의 머리를 붙잡고 거즈로 대고 있었던 것 같은 그 시점에,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그것도 무려 네 명이나. 순간, 이만한 사고에 네 명이나 인력을 투입할 일인지 물음표가 생긴다. 어쨌든 불의의 사고에 많은 분들이 와주신 것에, 에너지를 쏟아주심에 감사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피가 나는 아이를 놔두고 내 옷가지를 먼저 챙기는 나의 모습이 생소했나 보다. 선임 구급대원이 안방 드레스룸까지 같이 따라오셨다.

"어머님, 아이 입을 것도 좀 챙겨 주시죠. "

"아, 네!"

서둘러 나의 옷가지를 챙긴 후 머리에서 피가 나는 아이에게 옷을 입혔다.

“병원 A로 갈까요, 아니면 B로 갈까요?”

정신없이 B병원을 택했다.

B 병원 의사 선생님은 우리가 병실에 누워 있은지 30분 만에 오셨다. 그 시간이 빠른 시간인지, 느린 시간인지, 계속 강준이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켜 주던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일단 그 존재만으로 반가웠다. 그리고 더 반가웠던 것은 그 선생님의 아동 친화적인 모습.

"요즘에는 의료 기술이 많이 발달해서 바늘로 안 꿰매고 테이프로 붙여요."

하며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하신다.

순수한 아이는 테이프로 치료하는 줄로만 철석같이 믿고 인형을 품에 안은 채 약간의 통증을 잘 참아낸다. 봉합은 잘 끝났다. 안도하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4년 전 나의 몹쓸 언행이 떠올랐다.


한창 코로나 초기라 온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있던 시절, 우리 아빠는 맞벌이인 우리 내외를 도와주러 편도 두 시간이 넘는 길을 왕복하셨다. 주중에 계시고는 주말에 당신 집에 가셨다가 일요일 저녁에 다시 우리 집에 와주셨다. 그날도 어김없이 우리 부부는 아빠께 아이들의 등원을 부탁드리고 출근을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리더니 아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A야, 강준이 이마가 찢어졌다. 병원 가서 꿰매어야 할 듯해! "

"정말? 어쩌다가?"

"방문 틀에 부딪혔어."

이때 나는 해선 안될 말을 했다.


"잘 좀 봐주지!"


아빠는 어이가 없으셨는지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나는 아차 싶었다.

'몹쓸 말을 어떻게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전화를 끊고 불편한 마음에 동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그런 불효는 없다며 한바탕 혼이 났다. 부랴부랴 조퇴를 쓰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빠는 이미 강준이와 함께 상처부위를 꿰맨 후 반쯤 넋이 나가 계신 상태였다. 5살짜리 어린아이를 붙잡고 이마에 몇 바늘을 찔렀다 뺐다 하는 과정을 같이 지켜보셨으니, 오죽하셨을까. 젊은 나도 오늘 이렇게 힘들었는데 4년 전 아빠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병원에서 운전을 하면서 오는데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선하디 선한 우리 아빠가 받았을 상처의 무게를 짐작하느라, 나의 뻔뻔스러움에 스스로 화가 나서.


어리석게 후회하며 아빠에게 조심스레 사과드렸다.

"아빠, 내가 아까는 해선 안될 말을 했어요. 죄송해요."

"괜찮다. 강준이 이마가 잘 아물어야 할 텐데."


다음날 출근하니 부장님이 하는 말씀,

"아빠가 집에 간다고 안 하셨어?, 자기 그런 아버지 없다. 명심해. “


우리 부부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정말 감사하게도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 아빠는 그 후로도 2년을 우리 집에서 계시며 아이들의 등하원과 심지어는 집안일까지 도와주셨다. 지인 한 명 없는 타지에서 주중에는 유일한 취미이신 등산과 TV시청을 번갈아 하며 보내시고, 주말 일요일이면 엄마가 해주신 반찬을 바리바리 양손에 쥐고 와 주셨던 우리 아빠. 아빠가 우리 집에 계신 마지막 날 눈물 콧물 다 짜가며 지난 2년을 회상했다. 그 후로 3년이 지난 지금인데도 여전히 그때 생각을 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누가 딸은 평생 AS 받는다고 했던가. 30살을 훌쩍 넘긴 딸에게까지 사랑과 헌신을 쏟으시는 아빠를 생각하면서 부모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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