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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두 Nov 08. 2023

친구야, 고마워, 잘 가


 오후 세시,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세시 아니고 오후 세시. 전날 8명 혈기 왕성한 여덟 살 아이들의 땀에 젖은 파티를 주최, 후원했다는 명목으로 자고 깨고를 반복한 결과다. 하지만 오늘은 무려 160km를 이동해야 하는 약속을 잡아 놓은 날, 서울 가는 날이다. 이미 예매한 버스는 늦었고. 그냥 못 간다고 할까, 순간의 귀찮음이 나를 사로잡는다. 아니야, 20년 만에 만나는 날인데. 시간의 힘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운다.  


 가다 서다를 세 시간 반복해 도착 장소에 다다랐다. 띠링, 문을 열고 들어가 본다. 20년 만에 만나는 그들, 여전히 그대로일까, 변했을까, 어색하면 어쩌지, 몇 초의 시간에 수많은 생각이 섬광처럼 스쳐간다. 맨 먼저 마주친 눈은 나와 절친했던 유리, 나를 보자마자 어린 시절도 그러했던 잇몸이 살짝 보이는 미소로 손을 흔든다. 연이어 보이는 그들, 길에서 마주치면 알아볼까도 싶게 흘러간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는 듯하면서도 그때 그 시절로 소환해 주는 모습들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다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다. 바로 어제의 일인 듯 캐캐묵은 추억들을 끄집어내며 박수를 치며 웃음 짓는다. 몇 개의 단편들만 기억하는 것뿐일 텐데도 반가워하며 인연의 의미를 되새긴다. 우리는 함께 모닥불 앞에 놓인 사람들이 되었다.



 

 그 일이 없었다면 우리가 모일 수 있었을까, 그 일은 몇 개월 전 인스타 dm으로 시작되었다.

 '지연아, 나 우정중 혜진이!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하려나 모르겠네.'

 '응 기억하지! 우리 같이 졸업여행 무대도 서지 않았나 ㅋㅋ 정말 오랜만이다, 반가워~'

 '응 맞아 맞아 ㅎㅎ

  우리 중3 때 같은 반이었던 세준이가 어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대.. 그나마 연락되는 친구들한테는 어제 전달해서 오늘 장례식장 다녀왔어..'

몇십 년 만의 친구 안부에서 부고 알림 내용을 받았다.


 세준이? 사슴처럼 선한 눈망울이 기억에 남는 아이. 세상에게 슬펐고 타인에게 능숙하지 못했던 고등학교 시절 길에서 우연히 만나 용기 내 인사했던 것이 마지막이다. 그 후 졸업앨범을 찾아봤다. 사진 속 그 아이는 빡빡머리에 유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서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오늘 다시 만나 내가 잊고 있었던 일들을 떠올릴 수 있게 해 줬으면 좋으련만.   


  

  한두 잔 기울이고 나서, 누군가 술의 힘을 빌려 그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유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과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했고 상혁이는 옛 친구의 죽음을 보고 삶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말했다. 희은이는 미망인이 된 그의 아내와 남은 흔적처럼 남겨진 2세를 두고 마음 저려했다. 원희는 이제 이런 연락을 받을 나이라며 허탈해했다. 준호와 보영이는 말없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친구 덕분에 깨달은 하나뿐인 삶의 순간을 만끽이라도 하려는 듯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더 많이 웃었고 몇십 년 만의 공백을 자연스럽게 메우려 노력했다. 더 많은 과거의 인물과 사건들을 풀어놓았고, 누가 공통된 기억을 하고 있으려나 기다렸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 또한 보여주었고. 차차 더 많이 보여주자는 여지를 남겼다. 우리는 같이 뛰며 노래했다.   


 돌아가는 밤, 친구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얘들아, 우리 자주 보진 못하더라도 오래 보자."  

 돌아가는 밤, 나는 생각했다.

"친구야, 고마워,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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