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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물밖 꼬꼬즈 Dec 01. 2023

#2 엄마의 편지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난 뒤 

추석연휴에 부모님과 시부모님을 찾아뵀다. 

잘 다니던 직장을 나와 1년간 세계여행을 떠난다는 아들 딸에게 

망설임 없이 응원을 보내주시는 양가 부모님을 보며

우리 부부는 비옥한 땅에 뿌리 내리고 쑥쑥 자라는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한다. 


12살에 받은 엄마의 편지를 기록해둔다. 

초등학교 5학년 딸에게 

세상에 곧이 곧대로 순응하지 말라고 

너의 생명력 대로 살라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엄마에게서 자란 것은 

되짚어 볼 수록 감사한 일이다. 


우리 부부가 겁도 없이 세상 밖으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것은 

자라면서 받은 무한한 응원 덕택이지 싶다. 




사랑하는 딸 동아에게 

겨울이 아무리 길고 추워도 때가되니 어김없이 봄이 오는구나.

언 땅 속에서 씨앗들은 묵묵히 봄을 기다렸겠지.

파릇한 잎과 꽃과 열매를 피울 모든 설계를 끝내고 말이야.

마당 화단에 돋아난 어린 새싹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에서 찡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온갖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우리 인간들은 

눈이 조금만 많이 와도 불편하다 춥다 귀찮다며 주위 여건을 탓하는데 

저 어린 새싹을 보렴, 

조용하면서도 완벽하게 저의 생명을 소중하게 피워내는 모습을.


사랑하는 딸, 

그리고 세상 속에서 고귀한 생명으로 태어나 세상을 위한 고귀한 일에 쓰일 존엄한 인격체.

동아를 엄마 아빠께 맡기신 천지의 조화에 감사드린다. 

엄마 아빠는 너를 귀히 여기고 

언젠가 네가 너의 뜻에 따라 세상 속에 한 걸음씩 나아갈 때 밀어주고 안내하며 

두려울 때 언제든 돌아와 그 두려움을 풀고 용기를 낼때까지 포근히 안아주는 

안식처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너나 주영이는 그렇게 엄마 아빠의 소유물이 아니라 

엄연히 너희들 스스로 살아내야 할 삶의 몫이 있는 인격체란다. 

부모의 욕심대로 만들어지는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존재가 아니고.


너의 하루가 너 외의 다른이(엄마, 아빠, 선생님 등)의 주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면 

그건 천지의 생명께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야 할 슬픈일이다. 

그런 억눌림 속에서는 어떤 싹도 제대로 자랄 수 없는 거잖아.

엄마의 기본적인 뜻이 이러해서 너의 의견을 항상 존중하려고 한다만

너도 겪었다시피 때때로 엄마 자신도 스스로 이겨내기 힘든 기분에 

너를 혼란스럽게 내몰아 너의 기를 꺾어버렸어.

그런 점에서 엄마도 너와 똑같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세상 속에서 배워야 할 

미완성의 존재일 뿐이야. 


동아야

네 나이 열두살, 숟가락질 젓가락질 연필 잡는법 글을 깨우치고

사람사는 데 필요한 자잘한 방법을 너는 제 때 제 때 잘 배워왔다.

엄마 아빠의 안내를 잘 따라줬구나.

참으로 고맙다.

이제는 기본적인 그런 것들은 완전히 몸에 베여서 너의 일부가 되어버렸지.

마치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기 연습을 하던 선수가

모래주머니를 떼버리고 달렸을 때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있는 것처럼 말이야.

엄마가 보기에 그런 발전은 모두 동아 너 스스로가 하고자 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해.

아무리 주위의 안내가 좋아도 스스로가 거부하면 말짱 헛거잖아.


돌 무렵, 걷기를 배울 때 넘어지기를 골백번 하면서도 

기어이 한 발을 내 딛던 생명의 힘이 네 안에 흐르고 있어. 

그걸 기억해.

엄마의 이 말 뜻이 주위에서 시키는 일을 무조건 감당할 힘이 

네 안에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네 나이면 조금씩 비판적인 생각이 자랄 때거든.


요즘 엄마는 네게 '하지마라' 소리를 별로 해 본적이 없는 것 같은데,

대신 게임 시간 지켜라 

피아노를 칠 땐 그 시간에 집중해라

영어 들을 땐 영어만 들어라 하는 주문형으로 말법이 변하고

별로 내키지 않는 무거운 몸짓으로 묵묵히 따르는 널 걱정스럽게 여긴다. 

분명 하기싫을 때가 있을 텐데도 반항하지 않는 너를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이것도 반항하라고 주문하는 엄마의 욕심일까?

엄마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을 가끔 네게 했지만 

그 말이 이처럼 큰 위력으로 네게 작용할 줄은 몰랐다.


동아는 고집이 세서 어릴 때 좀 키우기 힘든 아이 축에 들었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걸 향해 곧장 돌진해서 

얼굴이랑 다리에 상처도 많아서 엄마 속을 태웠어.

하늘로부터 받은 너의 천성이 왜 이렇게 곱다란 순종의 모습으로 

그리고 해야 할 것만 겨우하고 웅크려 버리는 모습으로 변했을까?

엄마는 요즘 그것이 안타깝고 그것이 슬프고 그것이 가슴에 한이 된다.


자기 안의 주장이나 생각이 강한 사람은 자기 주변의 어떤 힘이라도 뚫고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뜻에 따라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러나 생각의 힘이 약한 사람은 대부분 주위의 뜻에 맞추어

하루하루를 편하게 보내다 죽게되지. 

매가 두렵고 상처받을까 두렵고 왕따되기가 두려워서 가늘고 기~일게 사는거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아. 

그런 삶을 자신이 선택했다면.


동아야

엄마 아빠는 네가 일류대에 들어가서 일류직장을 얻고 돈을 많이 벌어

우리한테 좋은 물건도 많이 사주고 해외여행도 시켜주는 

그런 것 따위가 효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네가 죽을 힘을 다해 공부를 1등 한다 해도

주위에 친구가 없다면,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했다면, 

오로지 공부만이 내 일이고 가족이 무슨일로 괴로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 1등이 무슨 의미가 있겠니?

그 1등의 실력을 세상에 펴 놓을 기회를 다 놓쳤는데. 


학교 생활에서 접하는 많은 일든 속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평등 평등 말은 하지만 왜 우리는 공부 잘하는 것으로 친구들을 줄 세우는가

왜 은연중에 반장은 남자가 되는 게 좋다고 믿는가

뭐 이런 것부터 작은 섬에, 작은 학교 속에 세상의 문제가 그대로 다 연결이 되어있잖니?

곱고 예쁜 공주 같은 말을 골라 쓴다고 좋은 시가 아니듯이 

네 앞에 놓인 하루하루의 생활을 네가 보고 듣고 느낀대로 쓰고 생각하는 것이

너를 참되게 할 방법이란다. 


동아야 

온실 속에 화초처럼 비바람 한 번 안맞히고 

엄마 아빠가 온갖 것을 다 막아주는 것은 

너를 진정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 아빠는 네 생활속에 든든한 후원자란다. 

사랑도 돈도 아낌없이 말이야.


누누이 말하지만 우리는 네가 기쁜 사람 행복한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그 자유를 그 기쁨을 그 행복함을 우리와 함께 나누기를 원한다. 

너의 앞에 놓인 일상 생활 속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해 내는 힘을 기르기 바란다.

그리고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힘써라. 생명력으로.

그저 착한 딸이기 보다 삶에 솔직한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 

그것이 너를 이 세상에 보내신 생명의 뜻이라 믿는다. 

엄마 아빠가 너를 선물로 받은데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딸아 사랑한다. 

부디 네 생각의 그릇을 키워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다오.


봄날에 엄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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