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良舞浪] 죽서루한량무

by 한량돈오


저의 ‘閑良舞浪 프로젝트’는 여행지에서 한량무를 추는 영상 촬영 프로젝트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공주, 영월 또는 몽골, 일본의 교토, 홋카이도 등에서 평상복을 입고도 연습도 할 겸 한량무를 췄습니다. 제가 출 수 있는 춤은 한량무 하나이지만, 어디에서 추느냐에 따라 춤의 느낌이나 저의 감정도 달라짐을 느꼈습니다. ‘한량무랑’은 한량무를 추며 유랑(流浪)한다는 의미입니다.


처음 올리는 이 글은 지난 4월 25일 젊은 예술가들과 워크숍이 있어서 삼척 죽서루에서 한량무를 춘 영상에서 시작합니다. 늘 부채가 있으므로 의상을 갖춰 입지는 못해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본래 많이 부끄러워하는 성격이지만, 한국무용 공연 기회도 있었고 콩쿠르도 나간 적도 있어서, 이제는 다른 사람 앞에서 어떤 장소에서도 춤출 각오는 되어 있는 편입니다.


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는 다른 관동팔경의 누(樓) 또는 정(亭)이 바다를 끼고 있는 것과는 달리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습니다. 자연석 위에 길이가 서로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워 지은 정자인데요. 강 건너 편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좋습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고, 2023년 12월 28일 밀양 영남루와 함께 대한민국의 국보로 승격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한량무랑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된 것은 제가 다니는 학원 ‘골든 캣츠’에서 영상 공모를 한 것이 계기였습니다. 지인의 한옥 고택, 강릉에 있는 하슬라 미술관, 영월에 있는 단종 관련 청령포 등이 떠올랐습니다. 배우자와 함께 여행으로 선택한 곳은 강원도 쪽이었어요. 2024년 10월 11일 금요일 점심 때쯤 출발했습니다.


먼저 하슬라 미술관은 백남준아트센터 자원봉사자 도슨트 동기들과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동해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고, 전시 작품도 다양해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미술관은 호텔이 함께 있었는데, 그때는 하슬라 뮤지엄 호텔에 묵지는 않았는데요. 이번에는 호텔에 숙소를 정했습니다. 아무래도 석양 무렵 다른 관람객에 많지 않을 때가 촬영하기 좋을 듯해서요. 문제는 갓과 의상을 따로 가지고 가서 갈아입어야 하는데, 과연 갈아입을 장소가 있을까 하는 게 걱정이었어요. 다행히 화장실이 있었어요. 몇 명의 관람객이 있었지만, 몇 차례 촬영 경험이 있어서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아쉬움이라면 아무래도 미술관 폐관 시간이 신경 쓰여 석양과 산 그리고 바다를 즐기며 춤추지 못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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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에는 영월로 이동했어요. 청령포는 1457년(세조 3년) 6월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이에요. 워낙 지세가 험하고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단종이 이곳을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오히려 슬픔을 깊게 할 정도로 일품입니다.


청령포는 예전에 딸과 함께 영월에서 공모한 영상 촬영하러 온 적이 있었어요. 이번에는 단종의 장릉에 들렀어요. 권력 다툼에 끼여 죽임을 당한 단종을 생각하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고난을 겪은 많은 사람을 떠올렸어요. 그럴 때 흔히 그렇듯 제 삶을 돌아보면, 그리 어려움이 크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꼈죠. 과거엔 많이 어려워했지만, 시간이 흘러 그 아픈 감각을 잊은 면도 있죠.


청령포는 숲이다 보니 장소가 평평하지 않아 춤추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사람들이 꽤 많기도 했고요. 지나가던 몇 분이 한참 보기도 하고, 영상을 촬영하는 분도 있었고, 제게 멋있다고 말해주는 분도 있었습니다. 단종의 슬픈 이야기가 있는 장소다 보니 화사한 쾌자를 벗고 흰 두루마기만 입고 춤을 췄습니다. 같은 음악이고 같은 춤동작이지만, 제 감정은 처연한 느낌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장소에 따라 내 감정에 따라 영상으로 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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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23년 4월부터 2년 동안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비상임위원이었습니다. 항일독립운동, 한국전쟁의 희생, 권위주의 시대 인권침해 등의 진실 규명을 인정할지를 판단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라 문서로 희생을 확인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희생자 수였습니다. ‘집단 학살’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사관들의 조사 결과를 읽으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단종 얘기가 다르게 다가왔던 것은 매주 이러한 죽음과 마주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감정적으로 동일시하는 건 적절하지 않지만, 그 상황에 대해 상상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그 죽음이 희생이라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듯해요. 어떤 사람들은 마치 영화 속의 이야기처럼 생각하는 듯해요. 아니면 전쟁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불법이라고 할 수 없어 희생자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거든요.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 나는 살아 있는 거구나 그리고 헌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하는 죄책감이 들었어요. 어쩌면 나의 죄책감을 덜고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나무들 속에서 춤을 추고 싶었어요. 청령포에는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거든요. 외국 여행도 좋지만 한국의 산들과 강을 찾아가서 춤을 추면서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머무르고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헌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도 해야겠죠. 헌법을 공부하는 일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연에서 춤을 추며 교감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삶과 생명을 떠올리고 싶었어요. 그게 나를 움직이는 용기와 힘이 될 거 같다는 확신이 들게 되었습니다. 7월부터 방학이고 9월부터 1년 동안 안식년이니 그동안 나만의 헌법 공부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요. 이제 그 첫발을 이렇게 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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