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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원 Apr 13. 2022

다시, 바람이 불어오면

장국영을 추억하다

그는 ‘만인의 오빠’라 불렸다.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주 오래전 그의 얼굴을 처음 본 그날, 나도 그의 여동생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물론 같은 집에 사는 오빠가 있었지만, 그 오빠와 이 오빠는 달랐다. 그의 이름은 장국영. 그런데 정말 오빠라고 불러도 될까? 국적은 고사하고 나이차가 무려 서른 살. 우리 아빠보다 여섯 살 동생이시니 잘 해도 삼촌뻘이었다. 그래도 난 꿋꿋이 오빠라 불렀다. ‘오빠’의 중국어 발음인 ‘꺼거’를 외치며.

비디오테이프조차 마음대로 빌려다 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영화 한 편 빌리려면 내 일주일 용돈을 사장님께 고스란히 바쳐야 했다. 그나마 명절이나 주말 저녁에 텔레비전에서 간혹 그가 나오는 홍콩 영화를 틀어주기도 했는데, 난 미리 준비해두었던 공테이프를 재빨리 골드스타 비디오 레코더에 집어넣어 빨간 녹화버튼을 눌렀다. 반쯤 잘린 영화를 수십 번 돌려보아도, 그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뿌듯했다.

그 아저씨가 도대체 왜 좋으냐면 도발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어디선가 구한, 그의 리즈 시절 모습이 나온 잡지 사진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사실 얼굴보다 중요한 건 마음이야.” 친구들은 혀끝을 차며 들은 체 만 체 했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우수에 찬 눈빛과 조각 같은 얼굴에 반한 건 맞지만, 영화 속 장국영은 어떤 배역 어떤 연기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의 기운을 항상 머금고 있었다. 때때로 이유 없이 슬프고 화도 나고 외로웠던 중학생에게 그 슬픔이 참 많은 위로가 되었다.

특히 난 그의 노래를 좋아했다. 카세트테이프에서 들려오는 광둥어 노래를 들리는 대로 한국어로 적어서 따라 불렀다. 훗날 중국어를 배우게 되면 이 노래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겠지. 특별히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는, 저 수많은 모래 속 작은 모래알 같던 내가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왠지 세상에 하나뿐인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지막한 목소리,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왠지 아름다운 광둥어, 가을바람을 머금고 있는 듯 쓸쓸한 멜로디가 내 마음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어느덧 수능을 앞둔 고3이 되었다. 고입 시험을 치르고 정신없는 학교생활을 보내며, 장국영은 이미 앨범 속 오래된 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바래 있었다. 저녁 급식을 먹고 친구와 학교 운동장을 돌며 장난치던 어느 봄날 저녁, 그날따라 벚꽃 향기를 가득 머금은 봄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이날 수업시간 내내 했던 ‘만우절 행사’를 떠올리고는 키득거리며 교실로 들어서니, 반 아이들은 아직 장난이 끝나지 않은 듯 장국영의 비보를 전했다.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그 이름. 이렇게 아름다운 봄에,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아도 기분 좋은 그날, 그의 이름은 믿기 힘든 소식과 함께 내 마음 저 어두운 곳으로 무겁게 떨어졌다.​


지금도 때때로 그의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듣는다. 수년간 중국어를 배웠지만 광둥어로 된 그의 노래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한다. 이제는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그를 만날 수 있다. 세상은 많이 변했고, 내 옆에는 얼굴이 동그랗고 성격이 밝은 남편이 있다. 남편과 중국, 홍콩, 대만 등을 여행했던 몇 해 전 봄, 몽콕 야시장을 구경한 후 숙소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문득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장국영이 가수 은퇴를 앞두고 발표한 앨범 수록곡인 ‘風再起時(다시 바람이 불어오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났다. 혹시라도, 먼 훗날 그를 만나게 될 날이 온다면 많은 말은 가슴에 담아두고 이 한 마디 전하고 싶다(광둥어로는 힘들겠지만). 내 삶에 반짝이는 작은 추억 하나 선물해 준 꺼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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