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신,
잔뜩 긴장한 채 나를 바라보는 백지 위에 어떤 이야기를 채울지 잠시 고민해 봅니다. 그러나 지루하고도 긴 이야기 끝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겠지요. 모든 것이 그 말을 위한 변명밖에 안 될 것을 알지만...
또 당신 곁을 떠나려 합니다.
우리의 인연은 왜 늘 엇갈릴까요? 하지만 엇갈리는 세월이 있었기에 간절했는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답니다. 나나 당신이나 퍽 용기 없는 사람이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잠시 망설입니다. 아무래도 처음 만날 때부터 시작해야겠지요. 흔히 그러더군요. 재수생 시절은 암담한 회색의 나날이었다고. 그러나 나는 아닙니다. 꿈이 있던 시절이었고, 힘이 되어주던 얼굴이 옆에 있었으니까요. 가끔 생각이 났습니다. 남산의 푸르름이. 당신을 다시 만나고 나서 더욱 자주 생각이 납니다. 남영동의 푸르던 불빛이.
당신이 내게 묻곤 했지요. 상규와 어떻게 만났냐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지요. 오가다가 만난 사이라고. 그땐 실없이 한 말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오가다가 만난 사이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사람의 인연 중 오가다가 만난 사이가 아닌 인연이 어디 있을까요?
그와 내가 어떻게 만났을까요? 낡은 영사기처럼 그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오월이었을 거예요. 누군가의 시선을 며칠 전부터 느끼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학원 수업 시간 때, 내 옆좌석에 한 남자가 앉더니 그 남자는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갈 때에도 나를 따라왔어요. 한마디 말도 걸지 않은 채. 참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죠.
나는 집에다 그 남자 얘기했고, 이튿날 저녁 그 남자는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는 오빠한테 잡혀 곤욕을 치렀지요. 그러고도 그 남자의 추적은 계속되었죠. 그러는 사이 나는 그 남자의 이름이며 출신 학교를 다 알았어요. 통하고 통하면 다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마 당신의 이름도 그때 알았을 거예요. 그리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죠. 그날도 버스에서 같이 내렸죠. 나는 정류장에 그대로 서 있었어요.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그가 있었어요. 나는 아마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을 거예요. 며칠 동안 쫓아다니며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는 상황이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잖아요. 그때 상규에게 내가 했던 말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기껏 왜 쫓아다녀요, 정도였겠죠.
그렇게 대화는 시작되었고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상규의 옆에 있던 동익 씨, 당신도 만나고...
이제 상규를 떠나보낸 이야기도 해야겠군요.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인데 이제야 말을 하게 되는군요.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너무 많은 사람을 아프게 했던 세월이었어요. 현장의 운동가도, 지켜보던 방관자도 모두가 신열을 앓던 때였으니까요. 당신도 많이 아파했었나요? 그랬겠지요. 나 역시 많이 아팠으니까. 그때 상규는 산 같았어요. 처음에는 구릉이었고 점점 솟아나는 봉우리, 나중에는 내가 오를 수 없는 험준한 산으로 느껴졌답니다. 상규가 현장에 빠져들수록 나와의 만남은 뜸해지고, 그 소원함만큼이나 나의 안타까움과 투정은 늘어갔지요. 그리고 상규는 국가전복 세력의 일원이 되어 경찰의 눈을 피해 다니는 수배자가 되었죠. 경찰이 나를 찾아왔어요. 상규의 행방을 묻더군요. 솔직히 무서웠어요. 상규랑 같이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말했어요. 이제 와서 무슨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상규가 그 사람의 집에 있으리라는 생각은 진짜로 못했어요. 그때 나는 능글거리는 형사와 그 숨 막힐 것 같은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 아무 이름이나 말하자는 마음뿐이었어요.
며칠 후 상규는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이후 상황은 당신이 더 잘 알테지요.
상규의 죽음을 알리는 당신의 전화를 받고 내가 뭐라고 그랬나요?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때 내가 뭐라 그랬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냥 며칠을 죽은 사람처럼 누워서 보냈어요. 진짜로 그냥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누워 있었던 것 같아요. 장례식에 가는 것이 두려웠어요. 그래요. 그건 두려움이었어요. 상규의 죽음에 대한 나의 과오는 절대 용서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 공포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냥 상규 곁에 눕고 싶었어요. 따뜻한 눈 속에 함께 누워 진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당신과 함께 상규의 무덤을 찾던 그날...
아, 지금 밖에 눈이 오네요. 당신...
이제 당신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사랑하는... 당신. 당신의 눈을 보고는 단 한 번도 못한 말이지만 진심이랍니다.
당신은 내게 늘 그늘이었습니다. 힘들면 언제나 쉴 수 있는 그늘. 상규에게 지칠 때면 당신을 찾았고 당신은 단 한 번의 투정도 없이 나를 받아 주었지요. 고마운 당신. 내가 바보도 아닌데 그때 왜 당신의 마음을 몰랐겠어요. 하지만 나는 당신 곁으로 갈 수가 없었어요. 내가 어떻게 당신 곁으로 가겠어요?
당신...
인연은 당신과 나를 다시 이어 주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음의 기쁨을 내게 안겨 주었어요. 고마운 당신.
그러나, 그러나, 당신과는 만남은 아련한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당신과 헤어져 오는 길은 늘 안개가 짙게 내렸어요. 안개를 헤치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 밑에 깔리는 축축한 기억들, 그리고 많은 얼굴들.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해야 이승의 질긴 업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나로 인해 또다시 아픈 사람이 생기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럴 수는 없어요. 이제 아픈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제 이야기 조금 할까 봐요.
아이가 있었어요. 유치원을 다니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였죠. 그 아이가 죽은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네요. 십 년이면 잊힐 만도 한데 요즘도 아이의 환영이 나를 괴롭히곤 하네요.
여름방학 연수가 끝나는 날, 남편이 아이를 태우고 연수원으로 나를 데리러 오는 길이었어요. 남편의 차는 트럭과 충돌을 했고, 아이는 그 자리에서 죽었어요. 척추를 크게 다친 남편은 육 개월을 병원에 있었지요. 하반신 불구의 남편 때문에 아이를 잃은 슬픔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어요. 병원에서 퇴원한 남편은 나에게 이혼을 요구했어요. 내가 그 이유를 물어도 그냥 헤어지기만을 원했어요. 나는 애원을 했죠. 당신 곁에 있게 해 달라고. 하지만 남편은 단호했어요. 결국 나는 이혼을 하고 말았어요.
이제야 나와 헤어지려던 남편의 마음을 조금 알겠어요.
사랑하는, 그리고 고마운 당신, 제발 아파하지 말아요.
사랑하는 당신 안녕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