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시 만났다. 설렘이었다. 그 설렘은 재수 시절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상규를 통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수업 후 학교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만났다. 만남의 횟수가 증가할수록 도희의 삶의 여정이 한 꺼풀씩 벗겨진 채 내 앞에 드러났다. 약혼자와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고, 한국으로 돌아온 도희는 결혼을 했다. 도희는 임용시험을 거쳐 교사가 되었고, 남편은 건축사로 일을 했다. 그리고 둘은 이혼을 했다. 이혼의 이유는 모른다. 내가 묻지 않았으니 도희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희는 내가 결혼을 하여 딸이 하나 있으며 지금 그 딸과 나의 아내가 호주에 있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간혹 도희와 함께 있을 때도 딸과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를 받을 때는 다정한 아빠와 듬직한 남편으로 변신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도희는 물끄러미 건네다 보았다. 아주 낯선 이를 보듯이.
만남에도 어떤 단계가 있는 것일까? 5월의 금요일 밤,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이었다. 선생님들의 회식은 저녁 식사에서 술자리로 이어졌다. 술자리가 파하고 한두 명씩 무리를 지어 자리를 떠났다.
도희와 함께 밤거리를 걸었다. 봄밤의 향기와 약간의 취기의 힘을 빌려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같이 있고 싶습니다.”
앞을 보고 걷던 도희가 얼굴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같이 밤을 보내자고. 너무나 통속적인 40대 남자의 막말이었다. 그리고 앞장서서 모텔로 들어갔다. 도희가 뒤따라 들어왔다.
여관방 한구석을 차지한 채 밤을 새웠던 금촌의 밤이 생각났다.
약간의 두려움으로 도희의 몸을 안았다. 도희의 몸이 차다고 느꼈다. 도희는 담담히 나를 받아들였다. 나는 도희의 냄새에 취하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도희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밤새 뒤척거렸다.
도희와의 육체적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것이 명백한 불륜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곁에 도희가 있고, 나는 바람에 날리는 그녀의 향기에 취할 뿐이었다.
여름방학 때, 아내와 딸이 들어왔다. 아내와 몸을 섞을 때에도 나는 도희 생각을 했다. 방학 내내 나는 충실한 가장의 노릇을 했다. 그리고 개학과 동시에 아내와 딸은 호주로 돌아갔고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그곳에 도희가 있었다.
하늘이 쏟아져 내릴 정도로 파랗다. 세상은 점차 붉게,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한가롭게 가을의 오후를 보내다 퇴근 시간 무렵에 휴대폰을 꺼내어 문자를 찍었다.
저녁 식사 같이 할까요, 시간 어떠세요?
잠시 후 휴대폰이 가볍게 떨렸다. 도희로부터 온 문자였다.
죄송해요. 저녁에 약속이 있어요.
나는 갑자기 시간 속의 미아가 된 느낌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책을 꺼내어 책장을 넘겼다. 형광등 불빛 아래 활자가 춤을 춘다. 활자의 춤은 더욱 빨라진다. 나는 그 춤의 호흡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상은 오래전에 어둠에 점령당해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정에서 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교실은 여전히 불야성이다. 교실마다 학생들이 자율 학습이라는 명목 아래 감독 선생님에게 붙잡혀 있었다.
정문을 나섰다. 가을밤 냄새를 느끼며 걸었다. 휴대폰이 진동을 하며 세상의 누군가가 나를 찾고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휴대폰의 액정에는 도희의 이름이 빛나고 있었다.
“웬일이세요, 약속 있다더니...”
“나 좀 만나 줄래요? 여기 삼성동인데...”
말 뒤끝이 명료하지 않다. 술에 잠긴 목소리다.
“주위의 찻집에 들어가 계세요, 곧 갈 테니까.”
나는 전화를 끊고 택시를 탔다. 휴대폰 연락을 주고받으며 찾아 들어간 카페의 어둑한 구석 자리에 도희가 앉아 있었다.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나를 발견하자 도희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내 팔을 끌었다.
“우리 술 마시러 가요.”
느닷없는 도희의 행동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나는 도희가 이끄는 대로 카페를 나서 주변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선생이 찾아왔어요. 김연수 씨요. 아참, 동익 씨는 김연수 씨 모르죠.”
소주 한 잔을 들이켜기가 무섭게 도희가 말을 쏟아냈다. 취기가 오른 목소리다.
“전번 학교에서 같이 근무하던 미술 선생이에요. 나랑 사궜던.”
나는 도희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도희는 술잔 위로 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김연수는 D고 미술 교사다. 도희보다 4살 연하이고, 미혼이다. 도희와 김연수는 D고에서 서로 사귀던 사이였고, 도희가 A고로 전근 와서도 한동안 만났다. 그런데 도희가 여름방학 직전에 김연수에게 그만 만나자고 이별을 통보했다. 도희는 둘의 관계가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내가 김 선생에게 그만 만나자고 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동익 씨 당신 때문이었을까요, 아닐 거예요. 그때 나는 이유를 묻는 김 선생에게 동익 씨 당신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어요. 그냥 내가 김 선생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이 언제부터 들었냐고요? 아마 만남을 시작할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나 행복하자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내게 행복이란 사치와 같으니까요...”
“그런 억지말이 어디 있어요? 행복이 사치라니.”
나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도희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바보 같은 사람이 오늘 찾아와서 뭐라는 줄 알아요. 다시 만나재요. 도저히 헤어질 수 없으니 다시 만나재요. 그 바보 같은 사람이”
“......”
“안된다고 그랬어요, 안된다고, 절대로 안된다고.”
도희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왜 안되냐고 그 바보 같은 사람이 물더군요. 그냥 안된다고 말했어요. 그 바보 같은 사람이 그런 말이 어딨냐고 따지듯 묻더군요. 그래서 얘기했죠. 딴 사람이 생겼다고, 곧 그 사람과 결혼할 거라고.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에게 아픔을 주어서는 안 되는데... 내가 많이 아팠으니 누구에게도 아픔을 주기 싫었는데... 그 사람 많이 아팠겠죠? 내가 왜 그랬을까요?”
도희의 붉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희가 다시 술잔을 들었다. 눈물과 함께 술이 가느다란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 밤 우리는 모텔로 갔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도희는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도희의 작은 몸을 안았다. 가느다란 헐떡거림을 토해내며 도희는 내 몸 위에서 잠이 들었다.
계절이 옷을 바꿔 입으려 한다. 가을의 끝을 겨울이 이어받았다. 낙엽은 벌써 바람에 날리어 시간의 창고 속으로 매몰되었고, 옷을 빼앗긴 가로수는 매서운 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
도희는 점점 말을 잃어 갔다. 도희는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불안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우리의 만남은 계절처럼 점차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