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3

by 마정열

3.

그 시절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회색이었다. 후암동 판자촌 가운데 우중충하게 서 있는 학원 건물. 아침저녁으로 밀려 들어갔다 밀려 나오는 생기 없는 얼굴들. 그 건물 뒤로 보이는 남산의 푸른빛도 기억 속에서는 뿌옇게 흐린 영상으로 남아 있었다.

후암동 골짜기의 재수생 시절. 남영동 바닥을 굶주린 개처럼 헉헉대며 핥고 다니던 시절. 그때 한 여인을 만났다. 서도희. 친구인 상규의 애인으로 내 앞에 나타난 여인. 그렇게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성격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소극적 성격이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정도가 더 심했으리라 여겨진다. 특히 고등학교 때까지 이성 교제가 전혀 없었던 나는 낯선 여자에게 말도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숙맥이었다. 그렇다고 여자에 대해 관심이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나 역시 왕성한 호기심으로 여성의 세계를 기웃거리고 있던 시기였다.

반면 상규는 연애 방면에는 천부적 재주를 타고났다. 무엇보다도 멀쑥하게 생긴 용모부터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상규에게 어떻게 도희를 만나게 되었냐고 물으면 상규는 그냥 오가다 만난 사이라고 얼버무렸고, 나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상규 옆에는 도희가 있었고 나는 멀찍이 떨어져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간혹 학원 정규 시간이 끝난 후 자율 학습 시간 때면 우리 셋은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하곤 했다. 긴 머리를 쓸어 올리는 도희의 흰 손을 보았다. 나에게 그것은 아픔이었다. 나의 사랑이 아닌 아픔. 그러나 결코 드러낼 수 없는 아픔이었다.


이듬해 우리 셋은 나란히 대학생이 되었다. 나와 도희는 같은 대학이었고, 상규는 대학이 달랐다. 나는 사범대 국어교육과였고, 도희는 문과대 영문학과였다. 법관을 꿈꾸는 상규는 법대를 택했다.

대학 교정의 봄은 푸르렀다. 그렇지만 우리의 대학 시절은 그다지 푸르른 젊은 날은 되지 못했다. 3월부터 끊임없이 학내집회가 열렸다. 4월이 지나고, 5월이 왔다. 1985년, 대학가의 5월은 광주였다. 학생들은 거리로 나섰다. 나도 그 대열의 후미에 붙어 구호를 외쳤다. 가로수 밑에서 대열을 지켜보는 도희가 보였다. 나는 슬그머니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그날 밤 상규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도희가 있었다. 상규는 광주에 대해 아픔을 토로했다. 그의 아픔은 진실이었다. 상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진정성 때문에 상규를 좋아했다. 도희도 그랬을 것이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에 쌓인 채 시간은 흘러갔다. 나와 도희는 교정에서 간혹 만나 가벼운 인사를 하고 지나치거나 도서관 앞 벤치에서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같은 과 친구 녀석들이 그 광경을 보고 애인이냐고 부러운 눈치를 보내면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애인이 되지 못한 아픔을 감추기 위해.

상규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도희 역시 그냥 오가다 만난 사이라고 싱거운 대답만 늘어놨다. 상규가 왜 좋으냐고 물으면 “어디가 좋지?” 하고 능청스럽게 대답을 회피했다. 그때 도희의 표정은 짙푸른 녹음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햇살 같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상규는 학생회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술 한잔을 앞에 두고 상규와 만났다. 그해 봄,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TV에서 또 한 젊은이의 죽음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술을 들이켜며 이성을 거치지 않는 한마디를 던졌다.

"분신자살한 사람들 말이야, 그거 개죽음 아냐? 아니 끝까지 살아서 싸워야지, 왜 그렇게 허망하게 불타 죽어."

그런데 그때 상규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한참의 두려운 침묵이 지나고 상규가 입을 열었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마라. 나도 죽을 것 같았으니까. 아니면 누구를 죽일 것 같았으니까."

석고상처럼 굳은 얼굴로 상규가 말했다. 순간 나는 나의 잘못을 깨달았다. 죽는 자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했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한참의 침묵을 깨고 상규가 말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어. 밖에서는 학생들의 구호와 경찰의 군홧발 소리가 요란해도 나는 나대로의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어. 시장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었지. 누군가 도서관에 들어와서 울부짖었어. 사람이 죽었다 이 개새끼들아. 나와 싸우자. 안 싸우겠으면 나와서 구경이라도 해라. 나는 그 소리를 듣고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어. 그러나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했지. 다음날 나는 또 나의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가고 있었지. 그때 도서관 옥상에서 내 눈앞으로 떨어지던 그 선연한 불길. 주위에 사람이 몰렸고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그는 어제 도서관에서 들어와 소리를 치던 그였어. 나는 두려움으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어. 그에 대한 미안함과 나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밤새 뒤척이다가 다음날 나는 데모 대열의 뒷자리에서 돌을 들었어. 또 다른 싸움에 참전할 수밖에 없었어."

상규의 용기가 부러웠다. 상규는 그런 친구였다.

상규는 학생운동에 점점 더 깊이 관여했고, 상규와 도희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져 감을 나는 느꼈다.

교정에서 만난 도희에게 나는 물었다.

“요즘 상규 자주 만나요?”

그러면 도희는 쓸쓸한 웃음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상규 많이 바쁘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도희의 곁에 상규 아닌 다른 남자가 있었다.

학교 앞 찻집에서 도희와 마주 앉았다. 잠시 침묵 끝에 도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규와는 헤어졌어요.”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그랬어요.”

“......”

“동익 씨는 내가 천사처럼 보여요? 나 그런 여자 아니에요, 그냥 여자예요. 짜증도 많고 화도 많은...”

갑자기 도희가 말을 쏟아냈다.

“상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허전함을 안겨주곤 해요. 그럴 땐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상규의 아픔과 분노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나는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사랑하지 않았나요?”

“사랑했어요. 하지만 사랑이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면 포기해야겠지요.”

“그 남자는요?”

묻지 않아도 될 말을 물었다.

“미팅에서 만났어요. 지금도 만나고 있어요.”

한 시대의 사랑이 끝나가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상규는 수배자가 되었고, 어느 날 상규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마어마한 이름의 반정부단체에서 국가전복을 획책한 죄목이었다. 나는 구치소로 면회를 갔다. 그는 여전히 넉살 좋게 웃으며 걱정 말라며 도리어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상규는 재판을 받지 않고 동부전선으로 강제징집을 당했다. 나와 상규 사이에 몇 차례의 편지가 오고 갔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곁으로 돌아왔다. 한 줌의 재가 되어서. 항시 그렇듯이 그의 사인은 군대 부적응으로 인한 자살이었다. 그의 시신은 간단한 신원 확인 절차를 마치고 너무나도 신속하게 화장이 되었다.

가족들의 오열과 친구들의 허망한 술잔을 받으며 그의 골분은 바다가 보이는 충청도의 야산에 묻혔다. 장례 기간 내내 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여인의 모습은 끝내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은 아픔을 점차 무력화시키고 흘러갔다.

도희에게 전화가 왔다. 거의 반년만이었다. 만나자고 했다. 거리로 나갔다.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약속장소로 들어섰다. 잠시 후 도희가 들어왔다. 검은 코트와 머플러에 찬바람의 냄새가 났다. 머플러를 풀자 여전히 긴 머리였다. 많이 야위었다.

나는 그녀의 근황을 물었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희는 만지작거리던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상규... 한번 가 보고 싶어요.”

그녀의 커피잔에 묻은 루주 자국을 보았다. 너무 흐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흐릿한 자국처럼 과거의 기억도 점점 사라질 것이다.

“어딘 줄을 몰라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기억이 있을 수도 있다. 잊어버리자고 머릿속의 기억을 억지로 지우려 해도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응어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져 어찌할 수 없는 감정으로 폭발한다.

도희와 시외버스를 탔다. 서울을 벗어나자 길 양옆은 눈밭이었다. 소복한 가로수가 우리를 전별하였다. 우리는 흰 눈의 세계로 조금씩 조금씩 들어갔다.

도희는 흰 국화 다발을 무덤 앞에 놓았고, 나는 담배에 불을 붙여 그 옆에 놓았다. 흰 눈을 덮고 있는 무덤이 아늑하다고 느껴졌다.

눈 쌓인 산길을 내려오며 도희는 몇 번이나 넘어졌다.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도중 그녀가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발길을 돌려 바다로 나아갔다.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매서운 바닷바람만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바다는 바람과 함께 무섭게 넘실대고 있었다.

“상규랑 강릉 갔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 바다는 따뜻했는데...”

말없이 바다를 응시하던 도희가 말했다.

“그때 약속했는데... 여름 바다의 해방감이 선물한 유치한 약속. 함께 하자는...”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사위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만 가야죠.”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우중충한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동도 않고 눈을 받아들였다.

세찬 바람이 분다. 눈보라 속에서 추억은 한 꺼풀씩 벗겨져 눈앞의 영상으로 떠올랐다.

학원 쉬는 시간에 만나는 상규는 기분이 들떠 있었다. 며칠 동안 같이 다니던 독서실도 나오지 않고 어딜 쏘다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뭔 일 있어?”

“응, 그냥 좀 바빠.”

말을 하면서 입가에 흘리는 미소의 의미를 나는 몰랐다.

그리고 며칠 후 상규는 한 여인을 대동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성숙한 느낌이 드는 여인. 어깨를 덮은 머리칼의 흔들림이 눈 시린 여인.

“참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진정성도 있고.”

나의 가슴앓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남자 주머니에는 몇 개의 동전이 항상 있었어요. 지하철이나 거리의 부랑자를 보면 주는 동전이었죠. 고기를 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게 낫지 않느냐고 말하면 고기 잡는 법을 배울 수 없는 사람도 살아야 된다고 말하곤 했어요.”

나도 상규의 진정성을 사랑한다. 그는 그런 친구였다.

말은 거기서 끊어졌다.

“함께 하자고 약속했어요.”

침묵을 깨고 도희가 조금 전의 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약속을 깼어요.”

어둠이 밀려왔다. 어둠에 갇힌 바다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눈사람이 된 도희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한참 후였다. 정류장 앞 상점에 들어가 시내로 나가는 버스 시간을 물었다. 20분 후에 막차가 온다고 했다. 나는 밖으로 나가 도희에게 20분 후에 차가 오니 그때까지 가게 안에서 몸을 녹이자고 했다.

“가지 말아요.”

나는 짧은 순간 혼돈의 상태를 맞이했다. 겨울밤 황량한 어촌 마을을 눈이 점령해 갔다. 도희는 앞서 눈 위로 흔적을 남기며 걸어 나갔다. 나 역시 말없이 도희의 뒤를 따랐다. 피차 말을 건네기에 가슴에 쌓인 감정이 너무 많았다. 친구의 여인이었고, 감히 말하건대 내 영혼의 사랑이었다. 그 어느 것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읍내 여관에서 나는 두 개의 방을 요구했고, 도희는 무표정하게 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날 밤 나는 밤새 뒤적이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 한두 시간이나 잤을까? 나는 창밖의 뿌연 빛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은 그친 듯했다.

나는 옆 방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나지 않았다.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노크를 했다. 기척이 없다. 덜컥 겁이 났다. 문을 열어젖혔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희는 밤새 자리에 눕지 않았나 보다. 이부자리가 깨끗이 정리된 채였다.

나는 정신없이 주인 여자를 찾았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주인 여자가 나왔다.

“나와 같이 왔던 여자분 언제 나갔습니까?”

“조금 전에 나갔어요, 아마 한 삼십 분쯤 됐을 거예요.”

어디로 갔을까, 도희는 어디로 갔을까? 도희의 걱정과 함께 왜 도희는 내 곁에 머물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에 가슴이 저렸다.

거리로 나왔다. 밤새 내린 눈으로 세상은 티 없이 깨끗했지만, 내 눈에 비친 세상은 잿빛이었다. 나는 더듬이를 잃은 벌레였다. 어디를 찾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찾아야 했다. 나는 눈길을 헤치고 큰길을 뛰었다. 숨이 턱에 차올랐다.

불현듯 상규의 무덤이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길을 되짚어 상규의 무덤을 향해 뛰었다.

산길의 눈은 누군가의 발에 의해 흩어져 있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을 뛰어 올라갔다.

해가 뜨고 있다. 겨울 해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그 속에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너무 평온한 풍경이다.

“안돼!”

온 산을 울리는 울림 속에서도 도희는 상규의 무덤 옆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나는 도희를 엎고 미끄러지고 엎어지며 미친 듯이 산길을 내려왔다. 도희를 보호하지 못한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미웠다. 각방을 쓴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멀리서 트럭 한 대가 달려왔다. 나는 길 가운데로 뛰어나갔다. 트럭이 나를 덮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트럭은 내 앞에 멈춰 섰다.

“아저씨 도와주세요.”

운전자는 엉망이 된 내 몰골과 등에 업혀 있는 도희를 번갈아 보더니 차문을 열어 주었다. 차 안에서야 비로소 눈물이 나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도희는 가느다란 숨을 쉬고 있었다. 간호사를 나를 응급실 밖으로 몰아냈다. 응급조치를 취하는 동안 나는 도희의 집에 전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로 더듬더듬 상황을 전했다. 숨넘어갈 듯한 도희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몇 시간 후에 도희의 부모님이 실성한 모습으로 병원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 나쁜 자식.”

도희의 아버지가 나의 멱살을 잡았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었다. 도희는 앰뷸런스로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살을 에는 바람을 안고 나는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며칠 밤을 하얗게 새웠다. 병원에서 퇴원한 도희에게 수차례 전화를 하였지만,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냉랭한 도희 어머니의 목소리로 인해 번번이 수화기를 놓고 말았다.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눈을 녹이는 봄볕 속에서 나는 논산훈련소로 갔다. 입대 전날 단 한 번만이라도 도희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기대 역시 도희 어머니에 의해 무참히 깨져 버렸다.

황산벌 황토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잊어버리자고, 잊어버리자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리움이 인간의 의지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은 그리움의 강도를 어느 정도 약화시켰다. 논산훈련소를 뒤로 하고 더플백을 메고 북상하였다. 그리고 임진강변의 철책 아래의 거처로 몸을 옮겼다.

감당할 수 없이 피곤한 졸병 시절이 좋았다. 잡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야간근무 시 쏟아지는 밤하늘 별을 헤아릴 때면 도희의 모습은 어김없이 별들 사이로 돋아났다.

두 번의 겨울이 지나갔다. 나른한 토요일 오후 늦게 한 여인이 나를 찾아왔다.

“김병장님, 애인 면회 왔어요.”

중대 본부 정상병이 야릇한 미소를 띠며 면회 소식을 알렸다.

“누구예요? 굉장한 미인이던데.”

“짜식아, 내가 애인이 어딨냐.”

나는 면회객 대기실에 도착하기 전까지 도희가 면회 왔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과 후배 아니면 여동생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 도희 씨!”

나를 그렇게도 아프게도 했고,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한 여인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도희는 고개를 약간 숙여 목례를 했다.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하고 싶은 말들이 서로 엉켜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 지냈어요?”

도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건강은 어떠세요?”

내가 물었다.

“내가 언제 아팠나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도희가 엷은 미소로 말을 받았다.

나는 도희를 잠깐 기다리게 하고 중대 본부로 달려가 당직사관에게 사정사정해 외박증을 끊었다.

우리는 금촌으로 나갔다. 길가 가로수에 눈이 움트고 있다. 봄날, 토요일 오후가 저물고 있었다. 찻집을 찾아 들어갔다. 제목을 알 수 없는 피아노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자리에 앉고 잠깐의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말을 꺼냈다.

“졸업했겠네요?”

“네.”

“취직은 했어요?”

“아뇨.”

단답형의 근황 문답이 계속되었다.

“나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요?”

“집에 전화했어요. 동생이 가르쳐 주더군요.”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도희가 말이 없다. 둘 사이의 침묵을 피아노의 선율이 메우고 있었다.

“나 다음 달에 약혼해요.”

딸깍. 커피잔 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다고 느껴졌다.

“왜 그런 소식을 내게 전하는 겁니까?”

“......”

잠시의 침묵 끝에 도희가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떠나기 전에. 그리고 고마움도 전하고 싶었고...”

“......”

“약혼하고 같이 유학을 가기로 했어요.”

“......”

“동익 씨도 본 적이 있을 거예요, 그이. 헤어졌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만나기 시작했어요.”

나의 침묵 위로 도희의 목소리가 계속 덮였다.

“도희 씨는 나의 감정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군요.”

목소리가 약간 높다고 느껴졌다. 도희가 말을 멈췄다. 피아노의 선율은 절정을 치달아 오르듯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어두워진 거리로 나왔다.

“동익 씨, 고마웠어요.”

기차역 매표소 앞에서 도희가 말했다.

“가지 말아요.”

도희의 앞을 가로막으며 내가 말했다.

“가야 한다는 거 알잖아요.”

“그래도 오늘은 가지 말아요.”

긴 침묵이 이어졌다. 망부석처럼 서 있는 도희의 손을 잡고 매표소 앞을 벗어났다. 도희가 순순히 따라왔다.

그날 밤 우리는 함께 여관에 묵었다. 한 방에서. 서로 방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서 가슴속에 감정을 차곡차곡 쌓으며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침 도희는 떠났다. 긴 기적 소리를 들으며 나의 어설픈 사랑이 끝났음을 비로소 느꼈다.


제대한 후 나는 도희의 소식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가끔 도희의 생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세월은 도희의 영상을 나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흐리게 만들었다. 졸업 후 나는 고등학교 교사로 임용이 되었고, 한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었다. 얼마 후 한 여자아이가 내 삶에 동승했다. 그렇게 삶은 흘러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