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을수록 바다는 중년 여인의 목쉰 소리로 울음을 토해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바다는 흰 포말을 내뿜으며 언뜻언뜻 몸을 뒤척였다. 울음 끝의 눈물인 듯했다.
영진은 담배를 빼어 물었다. 라이터의 불빛은 칠흑의 바다를 밝히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고작 담배 끝을 붉게 물들이는 정도였다. 영진의 호흡에 맞춰 담배 불빛이 타올랐다 스러졌다를 반복했다.
담배 연기가 폐부 깊숙이 스몄다. 담배를 잡은 손가락 사이에 흰 재가 얼룩졌다. 영진은 손을 바닷물에 담갔다. 바닷물이 손목 위까지 밀고 올라왔다. 그리고 발목을 적셨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영진의 발은 파도에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선생님, 우리 그만 헤어져요.”
세희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담배를 바다 위에 떨어뜨렸다. 담배 불빛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은 모두가 순간이었다.
영진은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 속, 그 어디에도 세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우리 그만 헤어져요.”
다시 세희의 축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진은 또 담배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라이터를 켰다. 세희의 얼굴이 불빛 심지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잠든 얼굴 위로 흩어져 있다. 영진은 그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화장기 없는 세희의 얼굴이 드러났다. 세희의 머릿결을 쓸어 올렸다. 어깨를 덮은 머릿결은 부드러웠다. 머리카락을 따라가던 그의 손끝이 세희의 젖무덤에 닿았다. 깊은 골짜기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깊숙이 빨려 들어간 영진의 손이 방향을 잃었다. 머뭇거리던 영진의 손이 세희의 유두를 움켜쥐었다. 세희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영진이 가볍게 떠는 세희의 몸을 품었다. 그녀의 호흡이 느껴졌다.
세희의 몸은 얕았다. 찰랑거리는 냇물 같았다. 영진의 몸과 세희의 몸이 부딪쳐 경쾌한 물소리를 냈다. 몇 차례의 울렁거림을 몸에 새기고 영진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침대보를 휘감고 누워 있는 세희를 바라보았다.
영진은 창가로 가서 커튼을 젖혔다. 모텔의 간판이 새벽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다. 섬은 안개에 갇혀 있었다.
조금 후, 그는 세희와 함께 안개를 헤치고 모텔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길이 열린 제부도 바닷길을 달릴 것이다. 둘은 안개의 내음을 맡으며 말없이 바다를 응시할 것이다. 차가 사강을 지날 때쯤 세희는 여전히 그를 외면한 채 말을 할 것이다.
“선생님, 그만 헤어져요.”
시계의 시침이 3자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바다는 아직 육지로 나가는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조금만 버티자. 곧 길이 열릴 것이다. 그러면 이 감옥 같은 섬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가면? 그곳은 자유의 공기가, 해방의 공기가 있는 곳인가?
영진은 그래도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곳으로 가야 한다. 섬 저쪽이 자유의 공간은 아닐지라도 삶의 공간이기에 그곳으로 가야 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삼일 남겨두고 일 년 동안의 학원 강의는 막을 내렸다. 이월부터 쉼 없이 달려온 강의였다.
한해의 마지막 수업을 끝낸 선생들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원장이 주최하는 회식 자리로 몰려갔다.
시간이 흐르고 몇은 이미 제어할 수 없는 육신이 되어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흘러갔고, 몇은 불나방처럼 밤거리 불빛 속을 헤매다 룸살롱으로 들어갔다.
영진을 포함한 다섯 명은 취기로 풀어진 눈을 껌벅이며 이 시간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웨이터가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가슴골이 드러난 민소매의 웃옷과 짧은 스커트 밑으로 곧게 뻗은 다리가 눈을 자극했다.
남자들은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여자들의 몸을 수색했다. 영진의 눈도 여자들을 한 명씩 훑으며 지나갔다. 눈길을 받는 여자들은 자신의 자태를 자랑하듯이 당당했다.
한 명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여자는 흠칫 놀라며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홀 밖으로 나갔다. 웨이터가 뒤쫓아 나갔고, 잠시 후에 다른 여자가 웨이터와 함께 들어왔다.
웨이터는 아가씨가 몸이 안 좋아 다른 아가씨를 데려왔노라면서 양해를 구했다. 일행 중 어느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여자들의 몸은 남자들의 욕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들의 몸은 마치 스펀지 같아 남자들의 체액을 남김없이 빨아들일 듯했다. 홀 안은 남녀의 교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술자리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진은 홀을 나와 웨이터를 찾았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며 홀을 나간 여자가 궁금했다. 영진은 웨이터에게 그녀를 잠깐 보자고 전했다. 웨이터는 영진을 빈방으로 안내한 후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 후 그녀가 들어왔다. 여자가 영진의 옆에 앉았다. 화장품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영진은 화장 속의 여자 얼굴을 살폈다. 굵은 속눈썹의 가는 떨림을 보았다. 이마의 한쪽을 가리고 흘러내린 긴 머리가 맨살의 어깨를 덮었다. 끝이 약간 말려 올라간 머리카락이다. 오뚝한 코밑의 입술이 유독 빨갛다. 여자는 분홍색의 손톱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쓸어 넘겼다.
“나를 알아?”
말이 짧게 나왔다.
“.......”
여자는 말없이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나를 본 적이 있어?”
여전히 말이 짧았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영진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이 깊었다.
“저...., 선생님 알아요.”
영진도 여자를 바라보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 OO학원 다녔어요.”
이런 젠장. 영진은 터져 나오려는 욕지기를 가까스로 참았다.
“서영진 선생님 맞죠? 국어 선생님.”
OO학원 시절이 떠올랐다. 벌써 오 년 전이다. 그곳에서 영진은 1년을 근무하고 그만두었다. 원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영진의 잘못이었다.
아내에게 애인이 생겼다. 그 사실을 아내의 입을 통해 들었다.
학원 강사의 생활은 영진에게나 아내에게나 힘든 삶을 강요했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학원에 나가 재수생 수업을 하고, 쉴 틈도 없이 저녁에는 재학생들을 가르쳤다. 집에 들어가는 시간은 늘 자정 전후였다. 개인 생활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간혹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영진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많았다. 몇 해 전, 경험도 없이 뛰어든 학업 사업 실패에 따른 참혹한 결과였다. 졸지에 학원장에서 학원 강사로 전락했고, 힘겨운 빚잔치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학원 강사 아내의 삶 역시 고단했다. 보통 사람과 생활 리듬이 바뀐 학원 강사의 생활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삶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부부 사이의 대화는 생기를 잃어 가더니 그것마저도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했던가. 영진은 가정에서 겉도는 자신을 발견했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우리 헤어져.”
학원 앞 카페에서 아내가 말했다. 영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남자 있어. 우리 헤어져.”
여전히 영진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허공만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영진은 아내의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밤늦게 들어간 아파트는 사람의 온기를 잃고 썰렁했다. 영진은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집으로 들어오라고. 내가 나가겠다고.
다음날 아내가 가져온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영진은 집을 나왔다. 며칠 후, 변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모든 처리가 다 끝났다고 했다. 아파트는 위자료로 아내에게로 넘어갔다.
그때가 OO학원에 근무할 때였다. 영진은 고시원에서 잠시 머물다가 원룸을 얻어 생활을 했다. 모든 것이 엉킨 듯한 느낌이었고, 학원에서의 생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때 내가 어땠어?”
“선생님요? 글쎄요, 약간 우울해 보이는 게 나름 괜찮았어요. 근데 선생님, 저 진짜로 모르겠어요?”
“글쎄 거짓말은 못 하겠고.... 솔직히 말해 기억이 잘 안 나.”
그 당시의 일이 무엇인들 생각나겠는가? 정신을 빼놓고 몇 개월을 살았다.
“하긴 내가 존재감이 좀 없었지.”
여자가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영진은 공연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때 일이 조금 있어서.”
“됐어요, 선생님. 그럼 아까는 내가 괜히 오바했네. 그냥 있어도 되는 건데.”
여자는 조금 전과 달리 발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깊게 파인 블라우스 사이로 젖무덤이 보였다. 화장품 내음이 그 깊은 골짜기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영진은 그 향기에 취한 듯 여자의 입술을 덮쳤다. 여자가 순간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영진의 혀가 여자의 입술을 집요하게 헤쳤다. 굳게 닫혔던 여자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 여자의 혀가 마중 나왔다. 영진은 여자의 혀를 깊게 빨아 당겼다. 여자의 혀는 쉽게 끌려 오지 않았다. 영진은 다시 한번 빨아 당겼다. 여자의 혀가 영진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영진의 손이 여자의 허벅지 사이를 더듬거렸다. 부드러운 맨살의 촉감이 느껴지는 순간 여자가 영진의 손을 잡았다.
영진은 여자의 허벅지에서 손을 빼고 여자에게서 떨어졌다. 여자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영진은 여자의 목덜미를 휘감고 있는 머리카락에 눈길을 주었다.
“선생님은 내 이름도 모르잖아요.”
여자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내 이름은 정세희예요. 사반 정세희. 선생님은 아직도 기억이 안 나시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진은 다시 여자의 입술을 덮쳤다. 둘의 몸은 엉킨 채로 소파 위로 쓰러졌다.
영진이 그 룸살롱을 다시 찾은 것은 보름 후였다.
영진은 웨이터에게 세희를 불러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세희가 룸으로 들어왔다. 밤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세희는 여전히 발랄한 표정이었다. 아니 발랄한 척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선생님, 술 많이 드셨어요?”
“아니, 얼마 안 마셨어.”
“거짓말. 술 냄새 많이 나는데.”
영진은 동료 선생들과 한차례의 술자리를 파한 후였다.
세희에게서 향기가 났다.
“선생님, 우리 놀러 가요. 나 내일 쉬거든요.”
향기 묻은 세희의 목소리가 맑게 퍼졌다.
“어디 가지?”
“제부도 가요. 나 거기 좋아하거든요.”
영진은 룸살롱에서 나와 어두운 새벽 거리를 걸으며 제부도를 생각했다. 그리고 원룸으로 들어가 제부도를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제부도로 가는 길목에 사강이 있다.
영진과 세희는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사강 시장 주변을 기웃거렸다. 해는 중천이다.
한낮의 세희는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불빛 아래의 세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시장의 노점상들은 커다란 고무 대야에 각종 조개와 횟감을 가득 담아 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배추와 알타리, 열무, 참외, 수박, 오이, 상추, 호박 등 농산물들이 한판을 차지하고 있고, 토끼, 강아지, 의류, 신발, 각종 농기구와 공산품을 펼쳐 놓은 좌판이 골목마다 들어서 있다.
바다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거리 양편으로는 횟집이 늘어서 있다. 그들은 횟집으로 들어가 늦은 점심을 하며 바다가 길을 내주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세희가 맥주를 마셨다. 맥주잔에 빨간 루주 자국이 선명하다. 영진은 세희가 언제부터 입술에 루주를 바르기 시작했는지 궁금해졌다.
“화장은 언제부터 했어?”
느닷없는 영진의 질문에 세희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자세를 취했다.
“응.... 언제부터지, 고등학교 때부터 했나.... 그런데 선생님,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아직도 화장한 젊은 여자를 보면 가슴이 설레서.”
세희가 눈을 살짝 흘겼다.
영진은 대낮에 보는, 옅은 화장을 한 세희가 낯설었지만 편안했다. 그 편안함은 설렘으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영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기분 좋은 설렘을 굳이 감추고 싶지 않았다.
바닷길은 하루에 두 번씩 열린다. 바다가 길을 내주었다. 영진과 세희를 태운 차는 바다 가운데로 난 길을 달렸다.
“선생님 이 섬 이름이 왜 제부도인지 아세요?”
“왜지?”
“옛날부터 이 섬은 물이 빠지면 육지에서 갯벌 고랑으로 걸어서 건널 수 있었대요. 어린아이는 업고 노인은 부축해서 건넌다고 제약부경(濟弱扶傾)이라고 했대요. 거기서 제부도란 이름이 나왔대요.”
영진이 놀란 표정으로 세희를 보았다.
“어제 책 보고 외웠어요.”
세희가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일이라 그런지 섬은 조용했다. 차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아도 오가는 주민 몇을 보았을 뿐이었다. 사람 대신 갈매기 무리가 땅과 바다의 경계를 오가고 있었다.
바다에 접한 음식점은 비어 있었다. 영진과 세희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홀 한쪽에서 무료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식당 종업원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그들을 맞았다.
사강에서 늦은 점심을 한 탓인지 음식이 그리 당기지는 않았다. 영진은 세희의 동의를 구한 후 소주와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세희가 영진의 잔에 소주를 부어 주었다. 영진도 그리하였다.
술잔을 부딪치며 세희가 말했다.
“선생님 반가워요.”
영진이 말했다.
“나도 반가워.”
세희는 고개를 젖히지도 않고 술을 마셨다. 술잔을 기울여 술을 입안에 품은 채 조금씩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끼룩끼룩 들렸다. 환청인지도 모른다.
“선생님 부인 예뻐요?”
몇 잔의 술로 얼굴이 붉어진 세희가 물었다.
“몇 년 전에 이혼했어.”
영진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세희가 영진을 바라보더니,
“이쁜지 물어봤는데 왜 이혼한 이야기를 해요?”
한다.
“기억이 잘 안 나. 아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다시 갈매기의 끼룩거림이 들린다. 아마 환청일 것이다.
갈매기의 울음이 이곳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섬임을 일깨워 주었다.
낙조다.
“나도 저 해처럼 붉게 탄 채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싶다.”
탄식처럼 세희가 말했다.
영진이 세희의 잔에 술을 부었다. 세희가 술을 마셨다. 붉은 세희의 얼굴에 어둠이 깔리는 듯했다.
어둠이다.
그들은 식당을 나와 방파제에 나란히 앉았다. 어둠 속에서 바다는 그르렁거리며 울고 있었다.
“선생님, 저랑 같이 죽어버릴래요?”
세희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울림은 간절했다. 영진은 그 울림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갔다.
영진은 생각했다. 나는 설렘을 안고 바다를 건넜는데, 너는 상처를 가슴에 품고 이 섬에 들어왔구나. 내가 네가 아니듯 너 또한 내가 아니었구나.
“사는 게 지겨워요.”
세희의 말은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울음이 되어 퍼졌다.
“고등학교 때 엄마가 이혼했어요.”
오랜 훌쩍임 끝에 세희가 혼잣말을 토해냈다.
세희가 대학 1년 때 엄마가 재혼을 했다. 그전까지 엄마와 함께 살던 세희는 새아버지와 사는 것이 어색해 따로 나와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엄마로부터 약간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으나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온갖 아르바이트로 버티어 보았지만 대학은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해야 했다.
세희는 그 뒷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영진의 어깨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바다는 뭍으로 나가는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
영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세희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고 생각했다.
영진은 칠흑의 해변을 걸으며 출구가 없는 삶을 생각했다. 그리고 세희의 제부도를 생각했다.
세희는 갇힌 섬에서 출구 없는 현실의 탈출을 꿈꾸었을까. 세희의 삶, 조각조각을 알 수는 없었다.
바다는 뭍으로 나가는 길을 보여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