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재회

by 마정열

그녀를 다시 만났다. 칠 년만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차례 입사 시험에 낙방을 한 동하를 이 회사는 받아 주었다.

동하는 영업부로 발령이 났다. 모든 게 낯설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하루를 보내는 바쁜 나날이었다.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동하는 복도에서 그녀를 보았다. 낯익음. 그리고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 회청색의 꺼풀을 깨고 고교 시절, 그 가을이 눈앞에 뿌옇게 떠올랐다. 거기에 흰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달린 명찰이 그녀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그 시절에도 그랬으니까. 나는 그녀의 주위를 돌던 행성이었다. 태양계의 행성으로 보면 명왕성쯤 될까? 행성 축에도 못 드는.

자리로 돌아왔지만 동하의 머릿속은 온통 그녀의 잔상으로 어지러웠다. 쿵쾅거리는 심장으로 손까지 떨릴 지경이었다.


권두섭이 불칼의 심판으로 죽던 다음 날, 동하는 아직도 권두섭이 불에 타 죽었다고 믿고 있다, 동하는 그녀를 찾아가 말해 주고 싶었다. 당신의 아픔을 수천 배의 분노로 갚아주겠다고.

동하는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듯 그녀는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긴 겨울이 시작되었다. 그 겨울을 어떻게 보냈는지 동하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아득하기만 했다. 반 아이들은 이제 고3이니 본격적으로 대학 진학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바쁘게 겨울방학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기형은 동하에게 학원을 함께 다니자고 하였지만, 동하는 다니던 학원마저 그만두고 겨울 내내 방안에 박혀 지냈다.

악인을 심판했다는 신념은 점차 사람을 죽었다는 죄책감으로 바뀌어 갔다. 언젠가는 나의 죄가 드러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밤이 되어도 방에 불을 켜지 않았다. 빛이 필요한 경우에는 촛불로 방을 밝히고 지냈다.

그러는 동안 동하에게 야릇한 취미가 하나 생겼다. 촛불의 너울거림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불은 아름다웠다. 화려한 움직임. 시선을 사로잡는 불길의 저 표현력. 파란 촛불의 심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투명한 하늘이 거기서 열리는 듯하였다. 조로아스터교도가 아니더라도 불은 숭배의 대상이 될 만하다고 느껴졌다. 불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의 모든 잡념과 묵은 갈등과 결론을 알 수 없는 모순들이 불에 타버리기라도 하는 양 사라지고 편안하게 마음 안에 재만 남았다.


야훼의 불칼이 심판의 불이었다면 겨울밤 동하가 발견한 불은 정화의 불이었다.

동하는 너울거리는 불 속에서 권두섭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는 처음에는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다가 어느 틈엔가 불과 하나가 되어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죄는 불로 인해 씻김을 당했다.

나는 그의 죄를 씻어준 사제다.

동하는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봄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권과 그녀의 잔상은 조금씩 흐려져 갔고, 동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갔고,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했다.

동하는 대학 시절 여자를 만나지 못하였다. 상처가 너무 컸던 것일까, 어쨌든 동하는 여자에게 쉽사리 접근할 수 없었다. 동기들은 그런 동하를 숙맥이라 놀렸다. 동하는 수줍은 웃음으로 자신의 마음속 상처를 가렸다.


그녀는 인사부 소속이었다. 인사부는 4층에 있고, 동하가 속한 영업부는 2층에 있어 서로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만났으니 멀리서 그녀를 바라만 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동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찾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에 대해 알아야 했다. 며칠의 두근거리는 시간을 보낸 후 동하는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동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그녀의 집을 거쳐 퇴근을 하였다. 골목 어귀에서 몸을 숨기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가곤 했다. 그녀는 퇴근 이후 특별한 일정이 없는 듯 귀가 시간은 거의 일정했다.

그녀의 집은 상일동이었다.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가 교회에서 사라진 후, 그렇게 그녀를 찾아다녀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를 동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겨울밤의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이사를 했다. 되도록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그래서 구산동과는 정반대 방향인 상일동으로 이사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만나고 있는 친구도 고등학교 때의 친구는 없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과는 철저히 단절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다고 그 기억마저도 단절이 될까?

그녀는 종종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면 동하는 초조해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시침이 막 12시를 넘기려는 찰나에 골목어귀로 자동차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앞세우고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눈이 부셔 확인하지 못했다. 자동차는 서둘러 떠났고 그녀는 희미한 가로등에 실루엣을 남기고 걸었다. 또각거리는 구둣소리가 서늘하고 낯설게 들렸다. 불현듯 어렵게 찾은 사람을 다시 잃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동하에게 그녀는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운전석의 남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동하는 그녀의 삶에 부당하게 개입하고는 싶지 않았다. 다만 한때의 삶을 송두리째 바치려 했던 사람의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까지 잘못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거의 보름 후에 동하는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골목 어귀 문 닫힌 가게 앞에서 동하는 그녀의 귀가를 기다렸다. 예상한 대로 12시가 가까워진 시간에 차 한 대가 골목 어귀에 섰고, 거기에서 그녀가 내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동하는 자동차의 옆으로 가 자동차 안을 살피며 지나쳤다.

동하는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인사부의 조대리였다. 동하가 입사 시험을 치를 때 그가 입사지원생들을 안내하였고, 신입사원 교육을 할 때도 그가 진행을 하였기에 그의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와 조대리는 한 달에 한두 차례씩 외부에서 만나는 듯했다. 청춘남녀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었다.

동하는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동하는 둘로부터 멀어지기로 다짐했다. 아련한 미련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고교 시절 이후 앓아온 열병도 이젠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아픔을 동반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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