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선물
사위에게서 문자가 왔다. 은퇴 후에 살 적당한 집을 알아보랬더니 후보지 세 곳을 보냈으니 그 중 한 곳으로 결정을 하면 될 것이라 했다.
영희가 조건으로 내건 것은 가능하면 두 딸들의 집과의 거리가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거리일 것(더 가까우면 안 됨), 30평 안쪽일 것.
그동안 두 딸을 키워 짝을 지어 내보냈고, 그보다 더 긴 세월을 철수의 수족으로 살았으니 이제는 온전히 ‘영희’로 살 작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철수도 떼어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나이 들어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아서 싫었다. 한집에 살되 서로 홀로서기를 할 참이었다. 영희야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철수로서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여보’ 한 마디면 다 해결이 되던 시스템에 이제 영희는 능동적으로, 철수는 수동적으로 작별을 고해야 할 참이다.
영희는 집 도면과 주소를 살펴보다가 한 곳에서 멈추었다. 주소로 봐서 영희가 아는 동네인 것 같았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영희는 그곳으로 결정을 했다. 철수는 집 문제는 영희에게 일임을 한다고 했으므로 다른 것이 걸릴 것은 없었다.
십여 년 전, 철수와 영희에게 심각한 고비가 있었다. 원만하게 해결이 되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영희가 일방적으로 덮어버렸다. 복병은 항상 마음을 놓고 긴장을 풀고 있을 때 뒤통수를 친다. 연년생이던 두 딸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막내딸이 갓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였다. 철수도 별일이 없는 한 정년까지 무난히 자리를 보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갑자기 철수가 핸드폰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 영희가 별로 레이더를 가동하지 않았어도 어설픈 철수가 너무 티를 냈다. 온갖 정보들을 흘리고 다녔다. 어떤 때는 핸드폰 소리를 죽여 놓지도 않아서 아침밥을 먹고 있으면 안방에서 카톡카톡, 카톡카톡, 불이 났다.
예의와 격식과 명분을 중요시하는 영희와 살던 철수는 그런 천방지축인 여자에게 물불을 못 가릴 정도로 빠져들었다. 매일 밤 사단이 났다. 철수는 절대 가정을 깨는 일이 없다, 저쪽도 마찬가지다, 심각한 상황까지는 안 갈 거다, 선을 지키겠다, 그냥 만나면 즐겁고 톡으로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정도다, 라며 영희에게 사정을 했다. 그것 좀 즐기게 그냥 넘어가 달라는 거였다.
영희의 생각은 달랐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눈이 맞으면 가정을 깨야지, 선도 넘어야지, 몸이 더 정직하고 정확한 거 몰라? 몸의 즐거움을 모르는 유치원 어린아이들이야? 내 꺼라고 침 안 바르고 싶어? 그 정도 배짱도 없으면 시작을 말아야지, 나 같으면 짐 싸고 뒤도 안돌아 본다, 너가 얘기하는 것은 희망고문이야, 매일 톡으로 희희덕거리고 반쯤 벗은 사진 보내오는 거 보고 있으라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며 맞섰다.
결국 표면적으로나마 영희가 이겼다. 공직에 몸담고 있는 철수로서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선을 지키고 안 지키고에 관심이나 있을 듯 싶어? 가뜩이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소문이라도 나서 윤리위원회에 회부되어 망신당하고 싶어?, 에 철수도 어쩔 수 없이 그 채널을 닫았다. 그러면서 영희에게도 마음을 닫았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는데 그 정도의 즐거움을 용납 못하는 영희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
그렇게 냉랭하지만 별일 없이 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 이제 두 딸도 짝을 지웠고 철수도 오랜 공직 생활을 마감을 했으니 보기에는 무난한 삶이었다. 그러나 철수도 영희도 무언가 허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이것이 인생의 다라면 무언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희가 이런 마음이 드는데 아마 철수는 더할 것이다. 왜 미련이 없었겠는가?
영희가 선택한 곳은 십여 년 전 철수가 목을 매던 그 여자가 살던 아파트였다. 정확하게 호수는 알지 못해도 아파트 이름과 동까지는 기억이 났다. 바로 그 아파트 그 동이었다. 영희는 그리로 가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 여자가 아직까지 그 아파트에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좋아하던 그 감정이 남아있다면 불씨를 한 번 살려보라고 하고 싶었다. 아니, 말은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대면하게 되어도 안 될 것 없다 싶었다. 마지못해 핸드폰에서 연락처를 지우며 철수는 영희에게 모진 말들을 해댔다. 가끔 영희는 그 말들을 되새겨보곤 했다. 정말 연락을 끊게 한 것은 순수하게 철수의 사회생활을 위해서였을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질투였을까?
남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살면서 영희는 진도를 나가고 싶은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꼭 한 번 그런 남자에게 살짝 마음을 기울기는 했지만 곧 바로 세웠다. 예술에 문외한인 철수와 달리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예술에 조예가 깊은 그 남자가 멋있어보였다. 호감이 갔다. 탐나고 갖고 싶었다. 상대도 영희에게 그런 느낌을 얼비췄지만 다시 인생에 남자를 끌어들여 무언가를 도모해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철수는 달랐다. 직접 실행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여자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많았다. 그렇지만 사회적 통념상 지켜야 하는 도덕성이 강했고 사회생활을 하느라 엄두를 내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들 세대의 기대수명이 백 살이라는데 아직은 한 번쯤 더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은 남아있을 터이다.
아침저녁 승강기에서, 마트에서, 체력단련실에서, 야외 벤치에서, 잔디밭에서, 산책로에서 얼굴을 보며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순간, 가슴도 적당히 뛰어주면 더 좋을 것 같다.
영희는 사위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을 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