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픈 사랑을 소망함
사십 대 중반의 철수와 영희는 학생신분이다. 아이 둘을 기숙고등학교에 보낸 터라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둘 다 빈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방식이 공부밖에 없어서 모처럼 의기투합하여 야간 대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철수는 박사과정, 영희는 석사과정이었다. 재정상태가 과히 원만하지는 않았지만 이왕 공부를 할 거면 그래도 학위라도 따두자는 생각이었다. 더 늦으면 시간이나 돈보다 몸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여름 방학을 시작하면서 영희는 철수에게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게 뭔데?” 철수가 물었다.
“긴 머리 파마.” 대답을 하면서 영희는 한숨을 쉬었다. <뉴욕 앤드 시티>에 나오는 사라 제시카 파커처럼 폭탄 맞은 듯한 긴 머리 파마를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더 나이 먹으면 더 꼴불견일 거라는 생각에 해보고 싶지만 망설이다가 시간만 보냈다.
“난 사자머리 별로야. 두 번째는?”
“여행 많이 하는 거.”
그거야 차차해도 되겠다 싶었는지 철수도 별 불편한 반응이 없었다. 지금도 많이 하고 있잖아, 토를 달긴 했지만.
“세 번째는?”
“가슴 아픈 사랑.”
이 대목에서 순간적으로 철수의 얼굴이 잠시 흔들렸다.
원래 지구력은 있어도 순발력은 ‘꽝’인 철수는 영희의 뜻밖의 말에 전의를 상실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철수는 영희의 말에 무슨 복선이 깔려있나 싶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철수와 영희는 오랫동안 연애를 했고, 결혼을 해서 살아온 시간도 만만치가 않다. 영희나 철수의 친구들은 그들 내외가 살아가는 그림이 좋아 보인다고들 한다. 그건 좀 떨어져 보아서 그럴 것이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지 않는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그들은 뭐 비극까지는 아니더라도 ‘장미의 전쟁’도 불사하며 살아왔다.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은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니 이렇게 밋밋한 ‘일상’으로 살아가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는 한다.
그렇다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선언할 것도 아니다. 아마 철수도 영희도 그런 만용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 다가오는 이 권태로움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가슴 아픈 사랑’ 운운도 절대 그냥 해보는 소리는 아니었다. 물론 일탈을 해서 ‘사고’를 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감정’을 가질 수는 있지 않을까……. 중년의 나이에서 한 번쯤은 넘어야 하는 고개가 아닐까 싶다. 철수와 영희의 대화는 이 대목에서 멈췄다.
영희가 동창 모임에 가서 이 얘기를 했더니 한 친구가 명확하게 결론을 내려 주었다.
“흐흥…… 가슴 아픈 사랑이라? 꿈 깨라. 우리 나이엔 그런 거 없다. 이건 있지. 가슴 아픈 불륜.”
모두들 수긍하는 눈치들이었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벌써 ‘사랑’도 꿈꾸지 못할 나이들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서글픔 말이다. 영희는 집에 와서 철수에게 그 얘기를 했다.
“여보, 우리 나이엔 가슴 아픈 불륜은 있어도 가슴 아픈 사랑은 없대.”
웃긴 건 갑자기 철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는 거였다.
이 마누라가 늦게 대학원에 다니더니 마음에 두고 있는 ‘놈’이라도 있나, 말은 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거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저렇게 좋아하지.
그 모습을 보니 영희는 괜히 부아가 났다.
“나 이제부터 머리 기를 거야.”
철수가 왜? 하는 표정이다.
“긴 머리 파마를 해서 예쁜 리본으로 묶어서 다닐 거다.”
“당신 나이엔 안 어울린다며?”
“내 맘이야. 우아하게 긴 웨이브 머리로 학교에 ‘쨘’하고 나타나야지. 개학하면.”
“등록할 돈은 있어?” 철수는 재빨리 초를 쳤다
“참 그게 문제네, 2학기 등록금.”
영희가 잠깐 우울함 속에 빠져 있는데
“예쁘게 보여야 할 사람은 있고?” 철수의 연이은 공격.
이러다 보면 결론은 뻔하다.
서로 다른 이불 덮고 자야한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