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었지만 자는 내내 뒤척거렸다. 이른 아침, 집 밖을 나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감꽃이 하얗게 떨어져 있다. 굵은 열매를 수확하려고 일부러 품을 들여 적과를 하는 마당에 하룻밤 비바람에 떨어진 감꽃이 무슨 대수랴 하겠지만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은 옛 생각에 젖어든다.
초가의 마당 한쪽에 서 있는 감나무, 그 아래 수북이 떨어져 있던 하얀 감꽃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얼마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 아버지가 나를 만나러 오셨다. 손가락처럼 길게 생긴 과자 한 봉지를 사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 다 먹으면 오마.”
어린 마음에 빨리 먹어버리면 아버지가 오래지 않아 오시겠지 하는 생각에 마구 먹다가 할머니께 들켜 혼난 기억도 났다.
농사일로 늘 바쁘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신해서 나를 보살펴 준 사람은 혼자 지내시던 작은어머니였다. 작은어머니는 성품도 온화했고 거기다가 상당히 미인이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랑에게 소박을 맞고 - 이 사실은 훗날 알았다 -아이도 없이 시부모님을 모시고 적적하게 살고 있던 터에 어린 질녀가 함께 지내게 되었으니 내심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말이 없고 겁이 많은 내가 안쓰러웠던지 작은어머니는 마당에 수북이 떨어진 감꽃을 모아다가 실에 꿰어 목에 걸어주었다. 가끔은 작은 경대 앞에 앉혀놓고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연지를 발라주기도 했다. 그것은 어쩌면 피어보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자신의 인생을 곱게 단장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시골의 밤은 일찍 어두워졌다. 호롱불을 끄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자기 전, 하루 종일 걸고 다닌 감꽃 목걸이를 윗목에 조심스레 벗어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줌도 누러 가기 전에 감꽃 목걸이부터 찾았다. 빛나던 하얀 감꽃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리고 실에 꿰여 있는 것은 그저 시들어 말라가는 거뭇거뭇한 감꽃 뭉치였다.
어린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시든 목걸이를 만지며 소리죽여 울고 있으면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작은어머니는 어느 새 내 기척을 알아차렸다.
“밥 많이 먹으면 이따가 또 만들어 주마.”
날마다 마당에는 감꽃이 떨어졌다. 감나무는 스스로 키울 수 있는 만큼의 꽃들만 달고 있고 나머지는 떨어뜨린다고 했다. 여러 날이 지나자 이제는 제법 몸집이 굵은 감들이 떨어졌다. 작은어머니는 그것들을 모아다가 소금물 단지 안에다 며칠 동안 담가두었다가 나에게 간식으로 주었다.
작은 엄마와 고디 잡던 그 개울. 산천은 유구한데 사람만 변한 듯
그 때는 일가친척들이 한 동네에 모여 살았다. 사흘이 멀다 하고 혼사나, 제사나, 어른들의 생신 등 집안의 모임이 생겨서 개울을 건너 마을을 오갔다. 밤이 아주 깊어서야 지내는 제사를 나는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오늘은 기다렸다가 그렇게도 맛이 있다는 제삿밥을 먹어야지 다짐을 하지만 매번 나는 작은어머니의 등에 업혀서 개울을 건너올 때에야 잠이 깨곤 하였다. 잠결에 느닷없이 달려드는 서늘한 기운에 눈을 뜨면 작은어머니는 나를 업고 징검다리를 건너고 계셨다.
은빛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달빛에 젖어있는 개울의 풍경은 어린 나의 눈에는 신기할 뿐이었다. 밤인데도 이렇게 밝을 수가 있다니. 희게 빛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둑을 따라 길게 늘어선 감나무의 하얀 감꽃도 밤이면 달빛 아래 밝게 빛났다. 개울을 건너 골목길에 들어서면 집집마다 서 있던 감나무의 감꽃 향이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먼저 알고 반겼다.
여름과 가을이 흘러갔다. 내 어린 날의 나이테는 그렇게 여물어갔다. 작은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야속함, 품에 자식을 두지 못한 허전함을 질녀인 나에게 쏟으면서 살았던 것 같다. 겨울이 오기 전에,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어린 시절 잠깐 나를 거둔 작은어머니와는 긴 세월 동안 각별하게 지냈다. 작은어머니도 몇 년 전 먼 길을 가셨다.
감꽃 목걸이는 내 기억 속의 가장 첫 부분이다. 인생은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긴 여정 속에 산재해 있는 장면이 많을수록 이야기는 더 풍성하고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수많은 풍경이 하나하나의 장면으로 남아 내 인생의 갈피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
감꽃이 필 때쯤이면 어쩐지 외로움이 밀려든다. 내 유년의 뿌리와 닿아있던 작은어머니를 여의고 난 후의 증상이다. 그날이 그날 같다는 서글픔이 마음을 잡고 놓지 않는다. 이런 날이면 느리고 고요하게 한 자락 추억을 불러와서 펼쳐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