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을 위하여

by 김제숙

착각을 위하여



흔히 우스갯소리로 ‘착각은 자유이고 커트라인이 없다’고들 한다. 지난 주말 그들 부부에게 일어난 일들도 바로 그 착각에서 비롯되었고 커트라인도 없이 무한궤도를 돌았다.

지난 토요일 전에 없이 철수가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바람이나 좀 쐬지. 세 시까지 얼마 전에 만났던 그리로 나와.”


철수은 이제 마흔 고개를 막 넘어선 여자고등학교 영어선생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영어 교사의 직업이 그와 잘 어울렸다. 우선 외모가 서양 영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생겨서 입학식날 신입생들이 “우와, 이 학교에서는 영어는 미국 사람이 가르치나봐.”하며 감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건 겉모습뿐이고 사고방식은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한문이나 윤리도덕 선생이 제격일 그런 위인이다.


그건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철수의 전화였다.

스피드 시대라 갱년기도 빨리 오는지 요사이는 영희는 그저 만사가 시들하고 온몸이 나른한 게 그만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연년생인 아들은 둘 다 중학생이라 어미의 잔손이 가야할 나이는 지났고, 여희가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이지만 취미나 생각들이 너무나 달라서 낯설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두 녀석이 어미 알기를 하숙집 아줌마로 아는지 도무지 곁을 주기 않았다.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며칠 전 영희는 두 아들의 나이 또래였을 때 살던 집에도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런 영희를 보며 철수가 출근하면서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문제가 뭐야?” 묻더니 아마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무튼 영희는 철수와의 약속 시간에 댈려고 부산하게 움직였어요. 우선 아파트 문을 온통 열어젖히고 청소를 시작했다. 영희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에는 되도록 부엌일이나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씀이 있어서 였다. 어느 어머니가 자식들에게는 더운 밥을 먹이고 당신은 늘 찬밥을 드셨단다. 그런데 아들이 장가를 갔는데 자기 아내에게 ‘어머니는 찬밥을 좋아하시니 찬밥을 드려’라고 했다고 핸다.

전업주부이긴 하지만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를 확실하게 해 두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들이 집에 있을 때는 되도록 같이 행동하려고 애를 쓴다. 함께 책을 읽고, 텔레비젼을 보고, 외출을 한다. 그런데 철수는 철수대로 바쁘고 아들 두 녀석은 중학생이 되더니 슬슬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청소를 마치고 아이들이 오면 먹을 간식을 식탁 위에 차려놓았다. 세월의 흐름을 어느 장사인들 막을 수가 있겠는가. 영희는 눈 밑에 거뭇거뭇한 기미를 감추느라 정성들여 화장을 했다. 꽃무늬가 화려한 투피스로 차려입고 토요일인 걸 감안해서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얼마 전에 여름 양복을 사느라 철수와 함께 들렸던 백화점은 시내 한복판에 있다. 잠깐 쇼핑을 하고 저녁을 먹고 영화라도 한편 보면서 연애 시절로 돌아가 보리라고 생각하면서 영희는 오랜만에 하는 둘 만의 외출이어선지 괜스레 마음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졌다.

철수와 영희는 십 년 동안의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을 했다. 연애 기간 동안의 철수는 요즘 말로 ‘부드러운 남자’였다. 쭈욱 그렇게 부드럽고 향기롭게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영희 혼자만의 환상이었고 결혼한 그날부터 철수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책을 한 권 써도 모자랄 판이다. 한 가지만 얘기하자면 영화를 좋아하는 영희가 개봉관을 빠지지 않고 순례를 하여도 군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군소리가 다 뭔가. 한 술 더 떠서 영화감상이 취미라고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는 취미는 커녕 공연한 시간 낭비라고 펄쩍 뛰는 것이었다. 속은 게 억울하고 분해서 영희는 며칠을 펑펑 울었다. 철수는 달래 줄 생각은 하지 않고 하는 말 또한 가관이었다.

“이봐요, 아줌마. 낚은 고기에게 떡밥 주는 거 봤어?”

그 때 보따리를 사지 않은 건 십 년 동안 사귀어 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탓도 있지만, 만 원짜리를 열 장만 주면 하루종일 셀 사람이어서 한심하기는 하지만, 성실하고 반듯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지금도 철수는 마누라 생일이 지났는지, 결혼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는지, 살고 있는 아파트 값이 얼마나 하는지? 두 아이의 결혼자금과 그들 부부의 노후자금은 어떻게 저축하고 있는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영희는 가끔 그런 철수가 답답하기는 했지만 다른 여자에게 한눈팔지 않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당당한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철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약속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났는데 철수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희는 이십 분 전에 와서 실내 분수 앞에 우아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약속 시간에 늦는 사람이 아니어서 삼십 분이 지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야속하게 꺼져있다는 메시지만 들렸다. 차도 두고 출근한 터에 삼십 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 철수가 야속했다. 철수의의 전화 한 통화에 좋아라 달려나온 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주책스럽게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다.

한 시간이 지나서 영희는 혼자 백화점 안으로 들어섰다. 화가 난 김에 그전부터 보아두었던 옷이나 한 벌 살 작정이었다. 색상이나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격표를 보고는 몇 번이나 만져보기만 하고 돌아서고 만 옷이었다.

‘이번에는 진짜 살거야. 내가 옷 한 벌 마음대로 사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버거운 것도 아니고 며칠 후면 결혼기념일인데 남편이 곰살맞게 챙겨주지 않는다고 해마다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4층까지 올라가면서 영희는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영희가 아파트 광장에 들어섰을 때는 여름의 긴 낮이 마지막 햇빛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영희는 들기에 버거울 정도로 두 손 가득 장을 보았다. 저녁 무렵이라 백화점 지하 슈퍼에서는 생선이랑 야채를 거의 반값으로 세일을 하고 있었다. 일주일치 반찬거리와 두 아이의 운동화와 추리닝, 피서 철이 지난 터라 재고를 남기지 않으려고 싸게 팔고 있는 피서용품 코너에서 철수의 수영복을 샀다.


아무래도 아이들을 불러내어 들고 가게 해야겠다 싶어 공중전화 부스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서고 있는 철수가 보였다. 철수는 벌겋게 익은 얼굴로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벙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영희는 너무나 화가 나서 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그 자리에 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 철수에게 달려가서 소리쳤다. “여보, 당신 어떻게 된 거에요?”

그러자 철수는 도리어 정식을 하며 “아니, 당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아, 더운데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고 당신 이게 뭔 줄 알아?” 하며 들고 있던 검정 비닐봉지를 영희의 눈앞에 쑤욱 내밀었다. 그러자 검은 봉지 안의 물체가 갑자기 퍼드덕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철수와 영희의 집은 일 층이라 베란다 앞에 손바닥만 한 마당이 있다. 철수는 가을이 되면 거기에 배추를 심어보겠다더니 주말을 이용해 씨앗을 사두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철수의 학교에서 시외버스로 한 시간쯤 가면 닷새에 한 번 씩 서는 장이 있다. 영희도 얼마 전에 철수와 그 곳에서 만나 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한 것이다. 도시에서 나서 도시에서만 살아온 영희는 시내 중심가의 백화점 앞의 분수대를 생각했고, 농촌 출신인 철수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만날 수 있는 오일장을 말했던 거였다.


이래서 착각은 자유인가보다. 철수는 시장 어귀에서 영희를 기다리다가 혼자 기웃거리며 오일장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플라스틱 함지에 담긴 메기를 보고 앞뒤 생각 없이 덜컥 사온 것이다. 살아 퍼덕이는 생선을 눈앞에서 죽여야 하다니 영희는 철수에게 드러내놓고 눈을 흘기면서 메기매운탕 요리법을 오려둔 것이 어디 있나 찾기 시작했다.

아참, 그리고 이건 철수에게 비밀이다. 영희는 이번에도 그 옷을 사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다가 영희도 ‘찬밥을 좋아하는 어머니’가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영희는 걱정을 접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다 그런 것 아닐까요? 모두들 동의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