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사원증을 반납하고 얻은 것

완벽한 엑셀 시트를 찢어버리고 입학한 ‘부모 성장 학교’

by 연휘

2006년, 파란 로고가 선명한 국내 최대 기업의 합격 통지는 내 인생의 가장 견고한 울타리였다. 파란색 사원증을 목에 걸고 사업장 로비를 당당히 통과할 때면, 내가 세상이 요구하는 정답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당시의 나에게 ‘전업주부’라는 이름은 조금 낯선 선택지였다. "조금만 더 치열하게 살면 다 해낼 수 있을 텐데..."라며, 타인의 속도를 나의 잣대로 성급히 판단하던 참으로 좁고 서툴렀던 시절이었다.


시속 100km의 속도로 앞만 보고 달리는 것 외엔 다른 삶의 방식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입사 5년 차, 아기의 울음 섞인 투정과 쉼 없이 쏟아지는 업무 메일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던 어느 날, 나직하지만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물음이 내 마음을 툭 건드렸다. 내가 네게 맡긴 내 아이, 이대로 정말 괜찮겠느냐는, 지금 네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맞느냐는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그 다정하면서도 뼈아픈 물음 앞에 나는 처음으로 멈춰 섰다. 화려한 연봉과 성취는 달콤했지만, 정작 내 품에 맡겨진 작은 생명 앞에 내놓을 열매가 하나도 없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퇴사의 순간에는 단 1%의 망설임도 없었다. 거창한 순종이라 믿었기에 미련 따위는 없을 줄 알았다.


사표가 수리된 2011년부터 홈스쿨링을 시작한 2016년까지, 꼬박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이가 어릴 때는 육아에 매진하며 ‘좋은 엄마’라는 새로운 직함에 안주하려 했고, 아이가 유치원에 간 뒤에는 교회 봉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과거의 그 파란 사원증이 주던 그 짜릿한 인정과 보상을 교회에서의 ‘열심’으로 대체한 셈이었다. 나의 인정 욕구는 장소만 옮겨갔을 뿐, 여전히 타인의 박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시속 100km로 질주하고 있었다. 주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화려한 포장지 속에는 ‘나를 증명하고 싶은’ 지독한 자아가 숨 가쁘게 뛰고 있었다.


그 질주가 멈추고 강제로 집 안에 ‘눌러앉게’ 된 것은 2016년, 홈스쿨링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회적 가면을 모두 벗어 던지고 아이와 오롯이 직면하게 된 그 막막한 거실에서, 나는 다시 익숙한 무기인 ‘엑셀’을 꺼내 들었다. 30분 단위로 아이의 하루를 촘촘하게 박아 넣은 시트를 만들며, 나는 여전히 아이를 내 유능함을 증명해 줄 새로운 프로젝트로 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명은 엑셀의 칸 안에 고분고분 갇혀 있지 않았다. 정교한 계획표가 아이의 눈물 한 방울에 젖어 들 때마다, 숨겨왔던 내 밑바닥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나의 안락함’이 방해받는 것에 더 분노하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무너졌다.


11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이 ‘부모 성장 학교’의 만년 낙제생이다. 이제는 다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순간, 여지없이 내 안의 오만함이 고개를 들고 아이를 내 방식대로 빚으려 든다. 나는 아이를 멋지게 완성할 토기장이가 아니라, 아이와 함께 깨지고 뭉개지며 다시 빚어져야 할 똑같은 ‘진흙 한 덩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매일 아침 새롭게 배운다. 홈스쿨링은 자녀를 가르치는 기술을 연마하는 곳이 아니라, 나의 이기심을 하나하나 긁어내며 주님의 손길에 나를 맡기는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항복의 연습실이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도대체 왜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이 힘든 길을 선택했느냐”고.


그 질문 앞에 나는 이제 고백한다. 이 선택은 대단한 결단이라기보다 매 순간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던 세밀한 음성에 대한 아주 작고도 떨리는 순종이었다고. 내 욕심과 계획으로 시작한 것 같았던 이 길이, 결국은 나를 무너뜨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가기 위한 그분의 치밀한 인도하심이었음을 안다. 거실 식탁에 앉아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치열했던 모든 순간이 결국 우리들의 걸음을 가장 선하게 이끄셨음을 묵묵히 고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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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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