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사, 시작과 끝이 교차하는 비선형적 시간 해석을 중심으로
바티칸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두고 김혜란 가이드님이 들려주신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성모의 얼굴은 왜 이렇게 젊을까요?"
가장 보편적인 해석이다. 실제로 당대에 어떤 이들이 "어머니가 아들에 비해 너무 젊다"고 불평하자, 미켈란젤로는 '성모 마리아는 정숙하므로 신체적 젊음을 유지하고, 아들 예수는 인간적 본성을 따라 실제 나이로 표현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답했다. (미켈란젤로의 제자 Condivi가 쓴 전기에 기록됨)
미켈란젤로는 다섯 살 무렵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네 점의 피에타를 조각했다. 그의 생애 동안 반복된 피에타라는 테마는 모성에 대한 상실과 애도의 정서와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피에타의 마리아 형상에 기억 속 마지막 어머니의 얼굴을 투영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안던 성모(탄생)와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예수(죽음)를 겹쳐서 표현한 조각이라는 것이다. 성모가 아기 예수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얼굴이었으므로 저토록 젊고 평화로울 수밖에 없었다.
성모가 수태고지를 받고 예수를 양육하며 그의 미래를 몰랐을까? 인류의 구원은 고통 없이는 불가능하리라는 미래를 조금이라도 예지하지 못했을까? 누가복음 2:35에서도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이렇게 예언한다. "보라,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의 타락과 구원을 위하여 세움받았으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리라. 그리고 네 마음은 칼에 찔리듯 할 것이다." 예수 생후 불과 40일째의 일이다. 이런 예언을 알고 자신의 아이이자 구원자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이 해석에 따르면 피에타에는 기쁨과 비애, 시작과 끝이 동시에 담겨 있다.
성모의 두 손은 예수의 신체에 직접 닿지 않는다. 오른손으로는 천 한 겹 너머로 예수를 감싸 받치고 있으며, 왼손은 차마 아들에게 닿지 못하고 어정쩡한 위치에 떠 있다. 하늘을 향한 손바닥은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의미 같기도, "왜 이런 운명을 허락하셨나이까"라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마리아가 예수의 고난을 구체적으로 알았더라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정확히는,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막을 수 있었거나, 막으려고 시도했을까? 아닐 것이다. 만약 미래를 알았다면 예수의 부활 또한 알았을 테니 믿고 기다렸을 테고, 몰랐더라도 메시아로 내려온 그를 막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의 사명이나 부활의 약속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이야기는 지금 여기에도 있다. 고통스러운 미래를 알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상실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이야기.
바로 2016년 개봉한 드니 빌뇌브의 <Arrival(한국어 제목 '컨택트)>, 원작 소설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미래를 안다면, 바꿀 것인가?
적어도 <컨택트> 세계관 안에서 이 질문은 불요하다.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사고체계를 가진 존재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안다.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미래를 동시에 살아갈 수 있다. 원작에서도 이런 대사가 있다.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나로 하여금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소설은 이 사고를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페르마의 최단시간 원리'를 언급한다. 뉴턴 법칙에 익숙한 대중은 물리학 법칙을 대체로 원인과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빛의 굴절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자.
(원리) 빛은 공기보다 물에서 속도가 느리다.
(원인) → 속도가 변한다
(원인) → 빛의 파동이 느린 쪽으로 쏠린다
(결과) → 굴절 현상 발생!
이것은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인과적 사고다.
그런데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물리학 법칙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페르마의 원리로 표현되는 목적론적 사고다. "빛은 목적지까지 최단 시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택한다." 아니, 그럼 빛이 (1) 목표를 가지고 (2) 경로를 선택하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건 아니다. 다만 그들의 목적론적 사고에서 빛의 궤적이 한꺼번에 존재할 뿐이다. 아래 그림에서 빛이 A→B로 이동한다고 가정하자.
[왼쪽 직선 점선] 물속에서 느려지는 빛의 특성상 오히려 오래 걸림
[오른쪽 점선] 공기 중 거리가 늘어나 오래 걸림
[중간 실선] 최단시간 소요
이 법칙을 두고 소설에서는 말한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즉, 루이즈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루이즈의 삶이 '발생'한 것이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과학적 표현이다. 인과적 관점에서는 선택을 한다고 믿지만 미래를 알 수 없다. 목적론적 관점에서는 미래를 알 수 있지만 최단시간 법칙을 따라야 한다. 우주를 설명하는 물리학 법칙이 두 가지 방법인 것처럼 말이다.
그건 막을 수가 없어. 꼭 너처럼... 너의 수영 실력, 글솜씨 같은 모든 놀라운 재능처럼...
루이스는 영화 초입에서 딸의 처음과 끝을 본다. 이젠 아이가 없는 세상에서 병원의 원형 복도를 걸어,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한 날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들리는 질문, "아이를 가지고 싶어?" 동시에 '살아지는' 멈출 수 없이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 아이의 눈, 아이의 속눈썹, 아이가 그린 그림, 사랑하는 아기를 안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네. 그래요." 그제야 영화 타이틀 <ARRIVAL>이 화면에 표시되며, 시작과 끝은 동시에 있다.
Come back to me. Baby, come back to me...
내게로 돌아와. 아가, 돌아오렴...
루이스가 살아 있는 한, <네 인생의 이야기>는 영원히 시작되고 또 끝난다.
다시 피에타의 마리아 앞으로 돌아온다. 시므온의 예언을 통해 이미 “네 마음은 칼에 찔리리라”는 미래를 알고 있었던 여인. 내 아이가 인류 구원의 제물이 되리라 짐작하면서 예수를 키워낸 여인. 갓 태어난 딸 한나를 바라보며 루이스가 짓는 표정은, 젊은 마리아의 얼굴에 자리하는 한 점의 비탄을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너를 아프게 할 것들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그럼에도 이 세상에서 너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양자역학이나 신화적 예언의 영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은 유한하다는 것을.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알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막연한 사실로 알지만, 루이즈는 구체적 기억으로 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딸의 영혼이 떠나간 자리에 남은 차가운 손, 병실 복도의 어둠과 고요까지…. 그렇다면 적절한 질문은, “미래를 안다면 바꿀 것인가”가 아니라 “끝을 알면서도 시작할 것인가?“이다. 답은 당연히 “물론이지.” 그런 아름다운 삶을 이미 알고 있는데, 어떻게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리아와 루이스의 눈빛에 담긴 것은 운명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긍정이다. 이미 정해진 미래를 안다는 사실은 오늘의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는 가장 강력한 의지가 된다. 정해진 운명 속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형태의 자유의지일 것이다.
번외 1: 감동을 방해하는 잡상들
미래를 알고 수용하며 살아갈 것인가, 미래를 모르고 매 순간 나의 선택이라 믿으며 살아갈 것인가. (사실 불가능한 밸런스 게임이라는 점에서 별로 의미는 없다. 10억년 버튼 누르고 10억 받기 vs 그냥 살기 같은 거다.)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무엇이 더 낫다는 가치판단마저도 무의미하다. 그저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알고는 있는데...
나는 본래 종교가 없는 사람이다. 종교는 감동적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에는 사회적 통치/억압을 위한 기능론적 장치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피에타도 컨택트도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수용하고 지금에 충실한 인물을 긍정적으로 그려내지만,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인물이 달리 저항할 길이 없었으므로 가장 지혜로운 선택임을 알지만 현실은 다르지 않은가. 체계는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정치•교육•복지•의료•경제 모든 분야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특권을 위해 설계되고 왜곡된다. 이런 세계에도 필연성이 있다고 믿어야 하나?
모든 건 마음먹기 달렸다는 구절처럼, 내 삶에 풍파가 찾아온대도 수용하고 불합리 앞에서 눈을 감으면 파도를 넘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사실 많은 순간 좋든 싫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매 순간 눈을 뜨고 있기가, 온몸으로 저항하기가 너무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에타와 컨택트를 봤을 때 내 안에 종교적 체험과도 같은 감동이 일었던 것 같다. 이 삶에서 나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자세이기 때문에. (종교적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잡상 속에서… 정확히는 수용과 절망과 저항 사이 어딘가에서, 세계와 불화하는 모든 사람을 응원하며 살아가고 있다.
번외 2: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궁금했던 지점들
1. 댄버스(다른 언어학자)는 산스크리트어로 전쟁을 "싸움"이라 풀이하지만, 주인공은 "더 많은 암소를 원한다"라고 풀이한다. 번역은 하나의 사전적 의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의 문화적 기반을 이해해야 가능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것은 Sapir-Whorf 가설(사피어-워프 가설, "한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은 그 사람이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과 관련이 있다. → 이것은 나중에 헵타포드어를 '무기'로 번역할 수도, '선물'로 번역할 수도 있다는 점과도 연관된다.
2. 헵타포드에게는 영화의 주제인 문자 언어도 있지만 음성 언어도 있는데, 사운드 디자인에 대한 인터뷰에서 "동물 울음소리, 고양이 갸르릉 소리, 고래 노랫소리에서 착안해 변형했으며 전자음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3. 루이스의 딸이 희귀병에 걸리는 전개가, 루이스가 우주선(방사선)과 접촉해서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소설에서는 어차피 등산을 갔다가 죽는다. 영화적 연출을 위한 장치인 듯.
4. 루이스의 미래에서 헵타포드어 강의도 하고 책도 내는데, 그럼 앞으로 지구인들도 루이스처럼 사고하고 미래를 알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명확한 언급은 없지만, 미래를 알고 바꾸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사람은 결코 언어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인식의 전환을 수용하는 사람만이 루이스처럼 변할 수 있을 것이며 언젠가 인류가 그렇게 성숙할 때 헵타포드 문명을 도울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될 것이다.
5. 루이스가 낸 책 이름은 <Universal Language(보편언어)>이다. 왜 이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노암 촘스키의 <보편문법>이 연상되는데, 인류의 언어를 넘어서서 모든 존재가 시공간을 넘어 소통할 수 있는 언어 도구라는 뜻일까? 또 지구 안에 한정해서 봐도, 이러한 비선형적 흐름을 감각하는 사람은 파괴적인 전쟁을 택하지 않을 확률이 높으므로 분열을 봉합할 수 있는 보편언어(사고 도구)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6. 섕 장군의 아내가 남긴 유언은 "전쟁에는 승자가 없다. 오직 과부만 있을 뿐."(“In war there are no winners, only widows.”)이다. 현시점에서 아내는 이미 죽었고 그때 남긴 유언이라고 생각했는데, 미래의 유언이라는 해석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라고 생각함. 그리고 어차피 책에서는 이런 국제적 장치가 나오지 않음)
7. 영화의 주제곡처럼 쓰이는 막스 리히터의 <On the Nature of Daylight>는 리히터의 <The Blue Notebook>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이라크 전쟁에 대한 항의의자 유년시절을 반추하는 작업이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영화가 12개국의 분쟁을 봉합하는 내용임을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빛의 본성'은 빛과 어둠이 모두 있는 것이다.
→ 누구도 아닌 미국이 <컨택트> 같은 영화를 내놓았다는 사실이 기만적이고 못마땅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감독인 드니 빌뇌브는 <그을린 사랑> 감독이다. (일본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이 유행한다고 냉소적으로 비웃는 사람과 비슷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8.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스피노자 사상, 하이데거의 현존재, 니체의 영원회귀 관점에서 컨택트를 해석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