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건물들 사이로 내리쬐는 투명한 장대들. 하늘에서 내려온 노란 작대기에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었다. 딸아이의 발바닥이익을 수는 없어, 딸의 행선지를 경유하여 차는 이동한다. 열기와 차단된 우주선에는 음악과 목소리들이 커다란 끊김 없이 떠다니고 있다.
그러다 우주선 밖으로 하이얀 건물이 스쳐 지나갔다. 투명한 빛줄기들은 모든 방향으로 그 건물을 밝히며 가리켰다. 두 사람은 반사체에 동시에 시선을 주고선, 건물이 지나갈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백미러에는 나의 엄마가 묵고 있는 재활병원의 이름이 조금씩 멀어져간다. 그때의 우주선의 침묵을 나는 기도라고 회고한다.
라디오에서는 3초 이상의 공백을 방송사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라디오나 TV나 우리가 보는 매체들은 어떻게든 패널 사이에 마가 뜨지 않게끔 노력한다. 이런 경향성은 사회생활을 할 때도 영향을 주어, 가깝지 않은 사람과는 시간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말을 통해 조금씩 다가가나, 몇 초의 침묵으로 순식간에 미끄러진다.
그러나 몇 초의 공백이 정답에 가까울 때도 있다. 우주선에서 침묵을 합의하였을 때, 가족의 쾌유를 바라는 간절한마음을 서로 고스란히 전달하였기에...
지친 가족에게 향하는 눈빛,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지인 어깨에 얹은 손, 오랜만에 조우한 벗에게 꺼내는 포옹... 비언어를 대체할 언어는 없다. 침묵은 언제나 그것으로도 충분하였다.
우주선에는 다시 음악 위로 목소리가 흐른다.
“엄마, 프랑스에서는 침묵이 흐르면 그 순간 천사가 지나간 거래.”
살다보니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이 조금씩 늘어난다. 대낮의 우주선에서 천사가 발견되듯이... 나만의 아기 천사와 천사를 함께 느끼게 되기까지, 몇 번의 거대한 침묵과 눈물을 만나야 했다. 시간이 흐르니 내 세상에 함묵이 늘어간 거지만, 시간이 흘렀기에 이젠 아이와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평온. 우리가 한 공간을 동시에 바라보며, 동시에 한마음이던 그 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