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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Dec 22. 2023

진희에게



  비가 사라진 그해 우리 집 앞은 따스함을 되찾지 못하고 첫눈을 맞았어. 진눈깨비 흩날리는 시골 풍경은 네가 떠나가던 날 흩뿌리던 복사꽃과 다른 추위를 전달해 주었단다. 그날처럼 맑은 바람이 불어 코가 빨개지고, 뒷산이 하얗게 채색될 때까지 난 툇마루 위에서 고개를 숙인 채 오래도록 귀가 빨개졌어.     


 나비는 매일 앞집에서 만날 수 있었어. 막내라서 해진 옷을 물려 입는 나와 달리, 너는 언제나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걸 기억하니. 내 옷은 흙과 잘 어울렸는데, 그런 내 옆에서 너의 옷이 나풀나풀 가벼이 날아다녔지. 시원한 입매로 이쁘 웃는 너와 매일 골목에서, 마당에서, 초원에서, 각자의 방에서 함께 했었어. 그렇게 나도 너 같은 나비가  좋겠다는 생각도 하며 손을 잡고 등교하던 어느 날, 그 꼬마는 첫 번째 이별통보를 받았단다.     


 가족의 이사라는 너무 당연한 이유에도, 나비를 잡을 수 없는 내가 너무 무력했어. 마당에 부는 순풍에도 기류를 탈 나비가 없어 꼬마는 한참동안 공허했단다. 너는 나비가 아니라 나를 순환시키는 바람이었나 보다.  동네에 남아있어야 했던 어린나무는 나비가 날아가버린 빈집을 볼 때마다 마음에 뚫린 바람소리를 증폭시켜 들을 수밖에 없었어.     


 나도 네 에서 예쁜 나비로 자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떤 학생으로 자랐을지 우리는 편지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지. 언제나 글만이 가득하던 편지에, 한 번은 네가 사진을 동봉해 주었어. 그 사진 속에서도 너는 어릴 때처럼 환히 웃고 있었어. 처음 보는 얼굴들과 도심의 골목에서 익숙한 미소를 터트리고 있던 너. 너를 둘러싼 친구도 배경도 나의 것과는 너무도 달라졌지만, 환한 너의 미소는 변하지 않아, 나는 그 사진이 너무도 소중했단다. 나의 배경이 변하지 않았듯 너의 본(本)도 변하지 않았기에...     


 성인이 되어 너를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결혼을 축하하면서, 우리가 뛰어놀던 시절의 꼬마보다 더 작던 2세들이 어느새 성인이 된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기꺼이 주류에서 멀어져만 간다. 우리 부모님이 늙어가시는 걸 함께 나누면서 변해가는 우리의 환경을 함께 아쉬워하기도 하지. 다른 공간에 사는 너와 이렇게 희로애락을 나누니, 우리는 소꿉친구로 만나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셈이다.     


 어릴 때는 너와 즐거움을 나눌 날이 줄어들어 허전했으나, 지금은 슬픔을 대하는 너의 태도를 통해 현명하게 세월 타는 걸 볼 수 있어 감사해. 예쁜 말만 전하던 나비 같은 너는,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향취를 찾아가더라.

 3년 전 아버지가 내 세상을 떠나신 날, 밤중 빗길을 가르며 찾아와서는 침묵을 주었고, 여전히 눈물샘이 마르지 않던 내게 어느 날 담담한 말을 꺼내었지.

세상의 죽음은 슬프다. 그러나 누군가는 비극적이기까지 한 죽음을 맞는다. 아버지가 나를 먼저 보내는 사고를 겪지 않고, 연로하신 아버지를 보내고 슬퍼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한 게 아니냐...’

흉흉하고도 소중한 사람을 잃은 세상에서 살던 내가, 이 말을 기점으로 감사할 힘을 다시금 얻었단다. 점점 슬픔에서 빠져나와 글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올 한 해도 흘려보내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     


 연말을 맞아 오래전 그 편지에 사진과 함께 동봉되어 있던 테이프를 휴대폰으로 오랜만에 들어보았어. 테이프 재생기가 없어도, 테이프를 선물로 보내준 너의 마음과 캐럴을 부르는 맑은 가수의 목소리는 여전하더라. 동네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어도, 함께 자라날 수 있었던 우리의 작은 편지처럼...                    







추신:  목소리가 늙지 않은 그 시절 음원을 다시 듣듯,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찾아왔네. 모든  변하여도 변하지 않은 네가 늘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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