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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Jan 22. 2024

지나간 행복은 옛날이라 불린다




옛날 어느 시골에 사이좋은 부부가 살았어요. 복사꽃 피는 봄날처럼 그 마을은 언제나 평화롭고 따스했습니다. 봄이면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병풍에서 꽃이 피어나고, 가을이면 꽃보다 고운 단풍이 물들었습니다. 여름이면 개울가 찰박한 물결에 동네 아이들이 북적북적 멱을 감고, 겨울이 되면 꽁꽁 얼어붙은 논과 개울에서 앉은뱅이 나무 썰매가 아이들의 웃음을 태우고 휙휙 주행하였습니다.     


 얼어붙은  사이로 초록 기운이 소롯이 스며들면 새싹을 키우고 바삭한 볕뉘에 추수하듯 그 부부는 물 흐르듯 살았습니다. 그렇게 봄여름가을겨울을 굽이굽이 동행하다 보니 부부의 머리 위에 서리가 내려앉고, 많은 아기새가 살던 둥지는 홀가분해졌습니다. 다시금 둘이 된 부부는 주름이 파인 채 쪼그라든 그루터기가 되어 오래도록 함께 앉아있니다.     


 할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평생 곁에서 함께 걸어준 어진 할머니가 어쩌면 자신보다 더 오래 땅에 발을 디딜 거라는 것을... 나이테가 많아질수록 더 인자한 모습으로 고향을 지키던 보리수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한 일에는 예전처럼 열정을 지폈습니다. 두 명이 아니게 될 순간을 위해, 두 명이라는 명분을 우직하게 내밀어갔습니다. 두 명이 사는 집을 탄탄하게 키우고, 두 명이 사는 집에 곳간도 점점 채워갑니다. 두 사람은 그 시간이 더디게 오길 바라며 시간을 애틋하 준비합니다.    

 

 몇 년 후 할아버지는 강을 타고 머나먼 옆마을로 떠나야 했습니다. 노잣돈 말고는 아무것도 들고 갈 수 없는 그곳. 소리 내어 긴 울음을 산기슭에 끼얹은 후에야 겨우 돌아온 곳간에는 할아버지의 수북한 마음이 고요히 쌓여있습니다. 마음만 쌓인 방에 적막이 흐르고, 할머니는 마침내 홀로 남았습니다. 할머니가 더 오래 남아있기로 한 약속이 있으니까요.     


덩그러니 홀로 남은 대지에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릅니다. 할머니는 집에 꽃을 불러들였습니다. 마당에 핀 꽃에 물을 주며 키우고, 겨울에도 꽃그림을 색칠하며 적막감을 달랬습니다. 그루터기 위에도 꽃이 피어납니다. 할아버지가 힘쓰고 있는 흙 위에도 다시금 풀들이 노란 햇살을 입고 빛을 보탭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할머니는 긴 겨울밤을 지나는 길에 꿈속에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평생 사랑한 할아버지를 조우하니 반가운 마음에 무릎도 시큰하지 않았습니다.


할멈, 혼자 잘 지내나”

예... 아이들도 한테 잘하고 잘 지내요”

할머니의 만족스럽다는 대답과 달리 마음에 의해 할아버지가 잠든 꿈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수상하리만치 가벼운 걸음의 할머니에게 손사래 쳤습니다.

할멈은 아직은 여기 올 때가 아이다. 애들하고 좀 더 지내다 와도 안 늦다.”

할머니는 자신을 밀어내는 할아버지의 말에 걸음을 멈췄지만, 조금 서운했습니다.


그럼 영감이랑 나랑 만났다는 증거라도 주이소. 그걸로  살아볼게요.”

할아버지는 예전처럼 농을 합니다.

뭔 증거고. 퍼뜩 일나라. 들 걱정한다.”


오랜만에 봐도 완고한 할아버지가 예전과 같아 할머니는 고마웠습니다. 강까지 배웅을 하는 할아버지와 다시 헤어지기 아쉬워 발을 동동대 할머니는 눈을 질끈 감고 할아버지를 향해 팔을 뻗습니다.

그렇게 침상에서 다시 손을 움직입니다.     


 마침내 눈을 뜬 할머니는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식들을 향해 빙그시 웃어줍니다. 어떤 꿈속에서 헤매고 있어도, 고향 대신 병원에 있어도 할머니는 언제나 그루터기입니다. 그루터기가 오래도록 지상에 있기 위해서는 영양제가 필요합니다. 그런 할머니의 손목에는 꿈속에서 누군가 말려준 멍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엄마가 병상에 누운 지 어느새 1년이 되었네요. 지나온 길들이 꿈처럼 아련하고 그립듯이, 휠체어에서 웃어만 주는 지금의 엄마도 사무치게 그리울 날이 오겠지요.

이글 읽는 모든 분들도 행복이라 부를 '오늘'을 뜨겁게 사랑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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