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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Apr 29. 2024

초록 단풍의 가을 책갈피

샘결언니에게



 나이가 들수록 사연은 늘어가지만, 언니에게는 늘 싱그러운 풀 향이 나는 거 같아. 여전히 아카시아 향기가 푸릇한 고백으로 언니를 휘감을 것만 같은 고운 인상이건만, 가버린 것에 대한 아무 미련도 없이 가을 뜨락에 사뿐히 내려앉은 실루엣.  

봄처럼 감싸주고 싶은 가을인 그대의 과실들을 흐붓이 바라본다.      


 단아한 용모와 얼굴에 어울리는 차분한 목소리, 구름 위를 맨발로 걷는 듯한 부드러운 언행. 한동네에서 오래도록 알게된 언니의 첫인상은 이런 모습이었어. 각자 품에서 노오란 병아리들을 꺼내 봄볕 아래 햇살 한 뼘 찾아 종종거리는 걸 함께 바라보곤 했는데, 14년이 지난 지금 커피숍 유리창 너머에는 비어버린 두 품이 자연마냥 비칠 뿐이야.

    

 유리는 다시 반사하는 호수를 투과시킨다. 겨우내 품어온 향기를 초록으로 소롯이 풀어내는 저 순리들이 저마다의 싱그러움으로 출렁이고, 굽이굽이 초록의 이파리들은 물기를 머금어 반짝였지. 호수에 비친 동그란 하늘과 구름 사이로 갈증 느낀 나뭇가지가 뻗어 담그자, 쪽잠 자던 하늘이 찰방찰방 수면에 동그란 파문을 그리는 고요히 찬란한 봄 축제.

 호수를 끼고 나란히 걷다 보니 완장처럼 나이테를 한 겹 더 두른 단풍나무를 조우하였지. 붉게 타오르다 사라질 것 같던 가을 단풍나무를 위해 봄볕 아래 눈이 시리도록 시푸른 단풍나무... 보이지 않는 뿌리들이 발을 묶어 둔 것처럼 우린 한참을 굳은 채 서 있었어. 두터운 뿌리에도, 몇 번의 잎사귀를 떨구고도 여전히 푸르른 언니를 닮았더라.     


흔해 빠진 초록빛이 어찌 저리도 이쁠까.’

 언니의 말에 화답하듯 서정의 가지들이 줄줄 새는 햇살 사이로 반짝거렸어.

매해 시간을 떨구며 우직하게 새잎을 내는 저 나무. 우리가 인생을 한낱 숙제가 아닌 축제로 여기고, 비어버린 품을 상실이 아닌 여유로 생각할 수 있다면, 가을을 맞고서도 찬란한 봄을 보듬을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리고 작은 초록들을 바라보는 두 중년을 또 누군가는 멀리서 풍경으로 기억해 줄 거야.

    

언니. 일 년 만에 만난 우리는 안부와 마음을 가벼운 농담처럼 훌훌 띄우고 다음을 기약했지만, 진심만은 훨훨 날리지 않고 나지막이 가라앉아 지금도 내게 온기로 남아있어. 시간이 지나면 몸에 피어있던 색색의 낙엽조차 그리워할 나이가 오겠지. 그때도 풀향이 나는 고운 언니와 어떤 겨울을 날지 고르고, 소생의 방법을 응원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당신의 바람대로 아흔의 연세에 동네 초원을 거닐며 산책하다 그날 훨훨 떠나신 언니의 어머니도, 평생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건강히 살다 떠나고 싶다던 간절한 바람에도 병상에 누워버린 나의 엄마도, 다시 푸른 봄을 피워낼 아지랑이를 내고 있어. 굽이굽이 인생들이 다 귀하고도 별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조금씩 느낄 수 있을  같아.


 함께 했던 푸른 단풍나무와 언니가 하도 상큼하여 글의 여백에도 향긋한 풀향이 느껴져. 가을에 이어 겨울에도 서로에게 위로받는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먼 훗날 겨울에도 그대에겐 풀 향이 나기를.     




오늘도 그대의 푸른 단풍을 말리며,

까만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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