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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Jul 07. 2024

대지의 요나



#프롤로그

 그날 초록빛이 부유스레하게 비치는 우리 동네 뒷산이 나를 삼켰단다. 밤사이 바닥까지 깔아 둔 어두움을 여명의 빛이 돌돌 말아 올리고 있었지. 긴 잠을 수시로 갉아먹는 개꿈에 몽롱해져 버린 나는 처음으로 홀로 뒷산 초입에 서 있었어. 우물쭈물 지레 겁먹은 나를 한참 말없이 바라보던 초록빛의 거대한 괴물은 마침내 나를 꿀꺽 삼켰고, 뱃속에 들어가서야 나는 용기를 내고 배를 가르기 시작했단다.     



#01

 가족깊은 잠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어둠이 무서워 밤에 혼자 외출도 잘 안 하는 나인데, 왜 새벽부터 인적 드문 산에 홀로 올라가고 싶은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원래부터 잠이 얕았는데 더위로 인해 불면이 더 심해진 것이다. 눈을 감고 잠이 들기를 기다리는 상황.  그 순간, 방에서 풀냄새 가득한 바람이 지나갔다. 우리 집까지 초록의 그것이 찾아온 걸까 산으로 나서는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산에서 이 바람을 맞으면 불면이 해소될 것이라는 직감을 순간의 바람을 맞으며 느꼈다. 여명의 빛이 퍼지면 산으로 가리라. 나는 그 생각이 그것의 유혹으로 인해 생겨난 지도 모른 채 한 걸음씩 동네 외각으로 길을 나섰다.


#02

 잠시 뒤 빨려 들어간 산속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길어진 해로 인해 전혀 무섭지도 않았고, 오히려 밤의 시원함을 가득 품어 쾌적했다. 이슬이 내려앉은 풀잎들이 신발을 휙휙 휘감으며 살갑게 아는 척했다. 그렇게 축축하리만치 습윤한 산중턱까지 들어가고 발 밑을 보는데,

 내가 산이라 생각하고 오른 것은 산만하게 커다란 초록색 괴물이었다.

 포슬포슬한 피부의 그를 밟고 선 내 발바닥은 보드라워지고, 눈은 시푸른 천장 덕분에 높아지고, 공간은 끝간데없이 푸르게 펼쳐졌다. 산만하고도 온순한 괴물을 향해 나는 물었다.


 “어떻게 하면 여기를 나갈 수 있니?”

 괴물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나의 뇌 속으로 직접 말을 주입했다. 숲의 고요는 그렇게 지켜지는 모양이었다.

 “일단 너에게 물을게. 너는 여기 밖을 나가고 싶니?”

 고민하고 나는 대답했다.

 “사실... 그렇진 않아. 산 밑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알지만, 지금은 여기가 좋아.”

 괴물은 강한 바람으로 나무를 흔들고서는 의사 같은 친절함으로 진단을 확정했다.

 “너 산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구나?”

 “맞아. 며칠 전부터 들었어. 그게 어떤 상관이 있니?”

 괴물은 호탕하게 웃은 뒤 친절한 설명을 시작했다.


 “산의 목소리까지 들은 경우에는 산에 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거야. 마을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경우, 주로 듣곤 해. 내 속에서 나가려면 어떤 무기가 필요할 거 같아?"

 "음... 칼?"

 "하하하 칼도 필요할 수 있겠네. 하지만 난 그렇게 과격하지 않아. 여기를 나갈 수 있는 칼은 다름 아닌 네 발이야. 열심히 걷다 보면 네가 봐야 했던 것을 만날 수 있을거야. 나는 그 중개자인 셈이야."


 나는 초록빛 괴물을 믿고 열심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미명이 은근한 불빛이 되어 안개처럼 아득히 밝음을 틔워주고 있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 귀에 연연히 피아노곡이 두드리고 있었고, 다른 귀에선 바람이 묻은 이파리가 일기 시작했다. 점점 괴물의 끝이 보였다. 적막과 평온으로 순해진 내 귀까지도 초록빛 괴물의 입에서 마저 순조롭게 빠져나오자 내 앞엔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초원의 끝에, 묘하게 유행 지난 옷을 입은 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래... 너일 줄 알았어...’

산을 나섰을 때보다 훨씬 급한 속도로 나는 그 여인을 향해 걸어갔다.     



#3

 굽이굽이 우거지고, 등척도 곳곳에 배치된 구불한 중턱에서 가쁜 숨을 몰아쉴 때서야 나는 너를 느꼈어. 꽃잎 같던 네가 꽃잎처럼 분분히 흩어져 나를 떠난 후 나는 3번의 봄을 보내야 했단다. 만약에 후생이 있다면 너는 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고, 그렇다면 나는 바람이 되고 싶다고 했었지. 그 말을 하던 당시에는 웃으면서 가볍게 지나갔는데, 그 말을 기억한 가벼워진 너는 산 중턱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구나...     


 우리는 소중한 친구로서 여름 같은 나날을 함께 보냈지. 그러나 꿈에서만 너를 만날 수 있는 지금은 여름밤이 너무 짧을 뿐이야. 잠이 들 때까지 너와 나눈 꿈을 헤느라 산의 소리를 들을 만큼 잠이 많이 옅어진 모양이야. 초록의 그것이 우리 집까지 찾아온 게 아니라, 너에게 한 번 더 닿겠다는 자발적인 마음에 의해 난 산으로 들어왔나 보다.

 이젠 내 마음에서 3년 전 유행하던 옷차림 그대로 멈춰있지 말고, 나무로 남아주지 않겠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바람으로 이는 나무를 나는 오래도록 기억할게...     


 등산객들은 한 나무를 한참 쳐다보는 중년의 등산객 사이를 지나갔다. 초록빛 괴물은 오늘도 자신의 배에 들어오는 생명들과,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비밀을 품고 평화로운 낮잠을 잔다. 괴물 배에 들어온 새로운 나무 한 그루도 낮잠에 맞추어 광합성을 시작한다.     




# 친구의 3주기를 맞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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