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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Mar 07. 2024

실향

3학년 2반 국민일기



산 설고, 물 설고, 낯 선 이곳에 시집온 지 어느새 만 10년이 되었다. 시댁 식구 가득한 두 칸짜리 초가집에서 10년 동안 부지런히 일했더니 지아비 이름으로 된 논밭도 생기고, 기와지붕으로 이사도 갔다. 지난 여름엔 막내딸까지 무사히 태어나 내 옆을 꾸물꾸물 기어 다닌다.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다면 더는 소원이 없겠다.

지금까지 복이 너무 많았던 걸까. 막내가 얼마 전부터 홍역을 앓는다.

우리 애기는 무사히 얼른 지나가길 하늘에도, 부처에게도 빌어본다. 그렇게 간호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그렇게 마음을 쓰는데도 아이의 증세에 차도가 없다. 아기가 홍역이 심해져 잘못된 이웃들이 스쳐가길래,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 장날이 되었다. 나 말고는 돌볼 사람이 딱히 없어 아픈 아이를 업고 읍내에 나왔다. 홀로 장을 보는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 옆동네에 사시는 외삼촌이 거기 서 계셨다.

아재가 여긴 웬일이신교?”

"니 찾아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침 여 있었네.”

마주칠 땐 반가웠는데 다급하고 어두운 표정에서 불안한 그림자가 보인다. 내 등에 업힌 아이에게 올까 두려웠던 그림자와 닮은 것이...

그... 너희 엄마 있잖아, 그렇게 됐다... ”

외삼촌은 고개처럼 목소리를 떨구었다.


외삼촌과 나는 그 시끄러운 장터에서 말을 잃었다. 나를 살피던 외삼촌은 내 등 뒤에서 힘겹게 숨 쉬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제 할머니의 부고에도 빨갛게 정신이 없는 아기를 보며, 내가 외삼촌을 따라갈 수 없음을 서로 암묵적으로 느꼈다.


외삼촌은 상갓집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뜨겁게 숨을 쉬는 걱정을 등에 업고서, 오늘에야 슬퍼진 생각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한 발.

살아생전 엄마는 시집보내면 영창 보내는 거와 같다고 농담인지 구별도 안 가는 말을 하곤 했다. 운 좋으면 가끔 만나는 거지 뭐.

실제로, 시어른들의 허락을 받고 반나절을 걸어야 만날 수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엄마 만나러 걸어가던 그날이 그렇게도 좋았는데, 운 없는 오늘조차 나는 엄마에게 인사하러 갈 수가 없다.


또 한 발짝.

장독대에서, 부엌에서 불 때면서 시집살이로 홀로 눈시울을 붉히던 시간들. 장작불처럼 활활 타오르면 그 위로 엄마가 상영되곤 했다. 오손도손 우리 가족 같이 살던 시절이 영화처럼 펼쳐지다가 크레디트처럼 불씨는 꺼졌다.

그리고 오늘, 엄마의 불씨가 멎었다.


또다시 한 발.

엄마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 지금,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보다 더 떨어진 거리에서 엄마가 내게 인사를 한다.

애가 아픈데 안 와도 된다... 불효라 생각하지 마라... 이제 너의 집은 여기가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그곳이다...


한 발, 또 한 발...

축 쳐진 아이를 다시 들쳐 매고서, 발자국을 밟고 집으로 간다.

발자국은 밟을 때마다 바스락 환영을 보여주다 사라졌고, 환영이 끊어지지 않길 바라는 흐린 눈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발자국을 밟아 갔다.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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