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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사는 까만별 Feb 22. 2024

게으른 봄을 수놓으며

2학년 1반 국민일기



 오늘도 빨간 해가 떴다. 빨간 해가 꽃을 비추고, 소담한 우리집 담벼락도 비춘다. 그 담벼락 안에서 거의 완성되어가는 천 위의 꽃도 아침을 받아 피어나고 있다.


 꽃수를 놓고 있는 나도 아침을 받고 있지만, 나는 산천에 핀 꽃만큼 예쁘진 않은 거 같다. 공부는 더 하고 싶었어도 결국 딴 말 안하고 집안일하고 엄마를 도우며 지내온 내 손은, 내가 이따금 설렘으로 외출해서 보는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의 손보다 거칠어보인다. 힘들게 하루하루 사는 엄마를 생각해서, 들판에서 잡은 메뚜기를 장터에 팔고 얻은 돈을 엄마 손에 쥐어주는 그을린 나의 피부는 책속에 나오는 귀부인의 것과는 거리가 멀테니까.


 나는 일하느라 고백도 못 받았고, 여대생도 될 수 없으니, 가설 극장에서 본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말 그대로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나에게도 낮은 찾아들어서, 노곤한 봄햇살이 얼어붙은 흙에 쉴새없이 스며드는 헐렁한 봄날, 나는 엄마가 새로 지어준 옷을 입고 앉아있다. 내가 피운 꽃수처럼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고 여느날처럼 긴 머리를 한갈래로 땋아 내렸다. 툇마루위 바삭 마른 햇살도 새 옷이 마음에 들었는지, 치마위로 기어올라와 내 무릎을 살살 데워준다.


 햇살이 무릎을 데워오는 걸 느낄 수 있는 여유로운 오후. 나는 평소에는 일 한다고 부릴 수 없는 여유를 부리며, 홀로 빈 집에서 하얀 벽을 불러 꽃을 기른다. 햇살로 나른해진 우리 집은 내 옆에서 졸고 있다. 그러다 싸리문이 낯선 손길에 화들짝 잠을 깬다. 우리 집이 나와 같이 쿵쿵거리기 시작한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중년의 여자분이었다. 성큼성큼 마당으로 들어서더니 내 이름을 찾는다. 아 이제 때가 왔구나. 갑자기 낯선 싸리문이 벌컥 열리듯 나의 일륜지대사가 고요하고도 분주하게 휘몰아쳤다. 다시는 게으른 봄날이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그렇게 싸리문으로 새가 결혼소식을 물고 찾아들던 그해 봄날까지 나는 신랑 얼굴도 모르고 있었다. 며칠 뒤 지아비가 될 남자와 시어머니되실 분이 인사차 우리집을 찾아들었을 때도, 물 한 잔 달라 부탁하고 내 모든 움직임을 빤히 바라볼 때도, 결혼식날 서로 마주볼 때도 너무 부끄러워 고개를 제대로 들 수 없었으니까. 결혼식 앞둔 어느날 읍내사진관에서 약혼사진 찍을 때 낯선 얼굴을 잠시 용기내어 바라본 게 다인 사람과 나는 영원을 맹세하고 있었다.


 족두리를 쓰고 연지곤지로 수줍음을 찍고, 구슬 꽃 매듭 ... 태어나서 지금껏 처음 구경해보는 화려함이다. 오늘만큼은 영화관에 나오는 예쁜 배우와 내가 약간씩 겹쳐보인다. 내가 출가한다는 이야기가 번쩍번쩍 빛으로 동네방네 퍼져나가 흙으로 된 우리집이 대궐같이 화려해보인다. 산천에 꽃이 피어난 그 날, 내 옆에 낯선 얼굴과 백년가약을 맺고 있다. 더 이상 치마 위에 햇살을 쓰다듬을 수 있는 게으른 오후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중학교에 가서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었고, 영화도 책도 좋았고, 어쩌면 카메라 앞의 화려한 배우들이 부럽기도 했던 나는 그날에서야 가장 화려한 풍경과 많은 시선들 속에 한참 서있을 수 있었다. 모두가 나의 첫 주연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미리 바라보고 있던 엄마의 눈만이 내 옷처럼 붉었을 뿐...


 서산에 지는 해는 엄마를 닮은 붉은 눈을 조금씩 위로하며, 제 딸처럼 우리 집을 떠나가고 있었다.








# 8학년 국민일기시리즈는 친정엄마의 시선으로 막내인 제가 써보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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