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에서 열린 이야기들과 아침에 부산스러운 준비를 끝낸 대완은 등교 후 교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발을 뻗을 수 있는 양옥 보단 대완의 책걸상이 때론 더 편히 잠잘수 있기 때문이었다.
함께 자는 방에 대석이 형이이따금 친구들을 데려오면서부터 대완의 수면 시간도그만큼줄어들었다. 부모의 마음과는 다르게, 대완은 서서히 선생님의 말씀을 경전 삼아 잠에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업시간에 자는 것이 익숙해진 어느 날, 대완은 피로가 가시지 않아 쉬는 시간에도 엎드려 있었다. 그때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는 명찰 하나가 대완을 툭 건드렸다.
“친구야, 니가 가서 빵 좀 사와라.”
잠이 채 깨지 않은 대완은 명찰의 목소리를 박자삼아 대추나무 꿈을 꾸었다.
꿈은 대완이 산골에 살던 중학생 시절, 친구 준섭과 몰래 대치하던 밤을 가리켰다. 고고히 달빛을 쏘던 대추나무는 밤이면 후줄근한 넌닝과 츄리닝 차림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던 남자아이들을 기억하였다. 대추나무에 매달아 놓은 빨간 샌드백 옆에, 글러브 대신 하얀 수건을 감은 두 소년이 서있었다. 덩치가 큰 준섭과 그에 비해 왜소한 대완을 수돗가의 대얏물이 둘의 승부를 중계하듯 찰박하게 비추었다.
“자, 시작한다이.”
하얗게 질린 수건을 둘둘 감아 감춘 큰손이 맞은편 대완의 얼굴을 강타했다. 준섭과의 스파링은 친한 호랑이를 만난 것처럼 대완을 긴장하게 하였고, 그만큼 다시 맞붙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이게 하였다.
“대와이, 다시 받아랏.”
그렇게 대련을 진행하다 보면 준섭의 탱탱한 이마에 밭고랑 같은 깊은 골이 패일 때가 있었다. 달빛 아래서 한동안 달궈온 관성으로, 대완은 인상을 쓴 준섭의 주먹에는 봐주는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럴 때면 대완은 주먹이 피부에 닿기도 전에 마당 한 켠의 거름 쪽으로 냅다 내졸겼다. 그렇게 내졸겨도 호랑이에게 결국은 잡혀 가볍게 꿀밤을 맞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작전상 후퇴를 몇 번 반복한 뒤, 둘은 평상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까만 하늘에서 부서지는 별빛 사이로,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꿈의 파편들이 마구 튀며 번뜩였다.
“준섭아, 니는 맷집이 있어서 잘할 수 있지 않겠나?”
“와이, 니도 내졸기는 것만 잘하마 내가 보이 승산 있다.”
평상에서 키득거리며 웃음을 주고받는 둘 사이로 별똥별이 지나갔다. 간절히 비는 사람에게만 소원을 들어주는 별똥별 대신 대추나무는 소년들을 위해 묵묵히 샌드백을 들어주었다. 티브이 속 글러브를 낀 영웅들을 보며, 두 소년은 아픈 줄도 모르고 그렇게 굳은살을 키워갔다.
“야, 내 말 안 들리나? 빵 사 오라 카이!”
사흘 만에 학교를 나온 명찰이 이번엔대완을 세게 건드렸다. 순간 대완은 명찰의 얼굴에서 승냥이를 보았다. 아무리 승냥이가 교실을 호령해도, 우리 고향의 호랑이만큼은 아닐 것이다. 대완은 내졸길 생각도 없이 새로운 대추나무을 향해 팔을 뻗었다.
승냥이를 한 대만으로 눕혀버렸다는 소문이 전교에 퍼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준섭과 권투 선수가 되자는 다짐 몇 년 만에 대완은 교실에서 ‘원펀치’라는 이름으로 환호받았다. 링이 아니라 교실에서 환호를 받게 되었지만, 어쨌든 너무 빨리 주먹으로 환호를 받아버린 대완의 마음은 점점 교과서와 멀어졌다.
교과서 대신 대완은 어느 허름한 도장에 마음을 붙였다. 권투와 쿵후로 투명한 땀과 불투명한 통증이 침투하면 이 층에서 세 들어 사는 지금도, 밭일을 하느라 고생하실 부모님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어느새 대완의 신발은 도서관 대신 도장으로 가는 후미진 골목을 더 편하게 여겼다. 링을 향해 걸어가는 그 걸음의 끝에는 쌀포대를 주며 대완을 부탁하던 아버지의 거친 손이 있어 결국 대완은 그 어디에도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의 옷에는 종이냄새나 땀냄새가 아닌 술과 담배 냄새가 점차 배었다.
“진대완! 너 대체 어쩌려고 그러냐...”
다소 한심한 표정의 3학년 담임선생님 음성이 대완을 향해 날아들었다. 도시로 나온 이후로 큰집 식구조차 쉽게 꺼내지 못했던 그 비수가 한동안 대완 곁을 맴돌았다. 평화가 느긋하게 흐르던 시골에 살던 대완이 골목의 드센 바람을 맞기까지 얼마나 걸렸던가... 그날도 대완은 시곗바늘 위를 한참을 헛딛이며 집 주위를 빙빙 돌았다.
대완은 결국 후미진 골목 냄새를 가득 묻힌 채 귀가했다. 2층 계단을 오르자 낯설지만 흥건한 목소리들이 방에서 새어 나왔다. 방문을 열자 목소리만큼 얼큰해진 낯선 얼굴들과 대완은 눈을 마주쳤다. 낯선 얼굴들에게 흐르는 막걸리 냄새에서 대완과 마찬가지로 거리의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