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도 질긴 토끼풀

by 지구 사는 까만별


스산함이 연말을 휘감으며 미련으로 나부끼는 늦은 오후. 햇빛이 닿지 않아 차디찬 아스팔트를 종종걸음으로 거쳐서, 나는 응달에 위치한 도심의 층수 낮은 상가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희끗한 겨울 풍경과는 달리 할로겐이 넘치는 실내는 피사체를 비추며 반짝거렸고, 반사이익처럼 온 매장을 따끈하게 데우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객들이 비슷한 마음인지 가게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을 스쳐 안내해 준 구석진 한켠에 놓인 의자에다 가방을 내리자, 오래도록 맡아온 형상들이 나를 발견하고 미소를 띄운다.


세 사람이 재회하여 담소를 나누고 있자, 젊은 여자 사장님이 자그마한 상자들을 들고 와 내밀었다. 하얗게 불투명한 네모 상자 속엔 뭐가 들어있는지 우린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래전 학교에서 도시락을 여는 마음으로 가뿐 숨을 들이켜 상자의 뚜껑을 제꼈다. 흑백 속 엄마가 무얼 쌌을지 짐작하면서도 도시락은 설레는 것처럼. 하얀 상자 속엔 금빛의 반지가 차분하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금가락지에는 세 중년을 끼니 없이도 포만감을 주는 힘이 있었다.

“우와, 이쁘다. 기대한 것보다 더 맘에 드는데?”

“그러게. 이 나이에 똑같은 걸 하니까 나름 의미도 있고. 이게 바로 priceless 겠제 ㅎㅎ

제값을 주고 산 반지에도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쉬이 동의해 주었다. 평소와 달리 금의 물성보단, 같은 종류의 반지가 서로의 손에 있단 사실이 괜스레 더 좋았다.


세 잎 클로버처럼 커다란 행운 없이 소소한 일상으로 둘러앉은 세 여인은 새 반지를 약지에 끼고서 손가락 사이를 서로 뽐내듯 포갰다. 금가루를 녹여 원만하게 태어난 동그라미는 움직일 때마다 모나지 않게 반짝였다. 지천명을 지나고있는 나도 차라리 태생부터 둥글었다면 숱하게 깎이진 않았으리라...

세 여인은 큰 행운은 없어도 행복으로 이루어진 성실함으로 작은 가락지를 손에 끼울 돈을 모았다. 평생 우매한 나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이 순간을 함께 기억하자며, 풀향이 번지는 꽃반지를 하나 띄운다. 반지가 윤슬처럼 반쩍이자, 짙은 여름향기 사이로 풀향의 녹음이 차르르 일었다.



“갓 중학생이 된 나는 굽이굽이 오솔길을 지나 신작로에서 동동거리며 7시 50분의 아침 버스를 기다렸단다. 읍내에 있는 중학교는 우리 동네완 달리 매일 반짝이는 상점들을 볼 수 있었거든. 뽀얀 먼지를 뽈뽈 일구는 버스가 나를 태우고 덜컹덜컹 굴러가면, 상점의 거리 때문인지 새로운 걸 배우기 때문인지 내 작은 심장도 덜컹거렸어. 사방이 초록으로 병풍 쳐진 동네에서 벗어나 읍내 나지막한 학교 울타리 안에서 우린 처음 만났지. 가진 거라곤 부유한 마음뿐이던 부모님 슬하에 따숩던 아랫목에서 풍파를 피하며 자랐을 외동딸과 막내들. 14살의 미숙한 소녀들은 같은 교실에서 만났고,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이 웃으며 한 해를 보냈지. 전영록 가수의 책받침을 유달리 아끼던 민트색 블라우스를 입은 소녀는 매일 조금씩 사랑스러움과 생각이 늘어났고, 그때도 지금처럼 언어를 절제하던 또다른 소녀는 언어의 공백을 편지로 채워주어 난 그녀에게 서서히 스며들었지.

그 이후로는 우린 각자 다른 반으로, 그리고 진학한 학교도 모두 달라 꽃잎처럼 분분히 흩어졌어. 부서질 듯 여린 꽃잎이었던 우리는 저마다 성장했고, 마침내 중년이 되었네.

따로 또 같이. 그러고 보니 우리는 처음만 같았지 동선은 늘 달랐어. 14살 작은 발이 중학교 교문을 내디딘 첫걸음은 깨금발처럼 서툴렀고, 우리는 그 서투름만 간직한 채 헤어졌지만, 어쩌면 우린 그 서투름이 좋아서 서로를 끝내 기억해 주며 살아왔나 봐.

잘 보이지도 않는 무수한 미래의 사잇길에서 내 삶의 세 잎 클로버를 마주한다. 깨금발로 걷진 않아도 우리 앞에는 변수라는 돌부리가 많아 넘어질 일도 많아보여. 어렸을 때의 토끼풀 반지는 금가락지가 되어 서로의 작은 보험이 되어주길, 또한 우리의 우정반지가 유년의 토끼풀만큼의 힘을 내어주기를.”



연약한 소녀들도 꺾을 수 있던 그 여린 초록빛 들꽃들이 오늘따라 내 발을 휙휙 휘감는다. 서로를 감은 풀의 매듭은 끊겼지만 소녀들의 향기는 풀리지 않아, 초원으로 돌아가는 끈이 이따금 중년을 소녀들로 모이게끔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