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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fom Oct 18. 2023

계단함수
(Step Function)

#삶

  설정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다. 새벽 4시경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지고 선잠이 들었다 일어나는 패턴이 수 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면도를 하고 샤워를 한다. 밝고 화사한 톤의 옷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무채색 영혼들의 말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오늘 중요 회의나 보고가 있는지 상기해 본다. 패셔니스타가 되겠다는 것도 아닌데, 남들과 다른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차별화를 부르짖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버스가 한 정거장 앞에 있는데 엘리베이터는 빨리 오지 않는다. 버스 하나 놓쳤다고 지각하지는 않지만 정류장에서의 기다림은 늘 지루하기만 하기에 맘이 급하다. 다행히 버스에 오르며 버스 기사의 얼굴을 슬쩍 쳐다본다. 기사들은 대체로 무표정하고 급하게 운전하지만 오늘만큼은 흐름을 따라 편안히 운전해 주길 바라며 늘 앉는 자리에서 신문을 펼친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간간이 읽는 기사의 대부분은 비판적이고 자극적이며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기사의 내용보다는 의도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출근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해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마저 읽고 사무실로 향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보안 게이트를 통과할 수도 없다. 자리에 앉아 새로운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메일을 읽기 시작한다. 입사했을 땐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싶었고 소위 핵심 부서로 오게 되었지만 거창할 것만 같았던 업무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역학관계 위에 놓인 보여주기식 업무가 전부였다. 


  그렇게 드러나버린 본질에 언젠가는 익숙해질 줄 알았는데 도저히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루하루 화가 쌓여갈 뿐이다. 성과가 있을 것 같은 일들엔 어떤 식으로든 발을 담그려 하고 문제가 발생할 것 같은 일들에는 발뺌하기 바쁘다. 회사가 발전하는 것보다는 혹은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 성과가 나는 것처럼 보여서 당장 자신에게 문제만 없으면 그뿐이라는 의사결정에 따라 어부지리를 취하는 내외부 관계자를 보며 나중에 그 일을 감내해야 할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잔함이 밀려온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겠지.    


  남들이 볼 때는 안정적 직장에 큰 어려운 없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객관적인 것이 전부는 아니다. 본질은 변함없으나 상황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며 상승 추력을 잃었다. 변할 수 없는 것을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는 삶에 지쳐버려 나는 감정의 하강 나선에 빠져 버린 듯하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고 또 어떻게 살아왔나?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며 아무 일 없는 듯 지내다 내 인생의 절반을 넘는 시간을 할애한 후 어느덧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난 그때 과연 어떤 기분을 느낄까? 삶의 중요한 순간에서 내가 생각하고 고민했던 대로 결정을 했던가? 나는 내가 그려왔던 그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삶을 통제하고 내가 설계하고 예측한 대로 흘러간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하고 예측한 대로 산다는 것은 생각해 낼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살아간다는 뜻일 것이다. 삶은 생각하지도 못한 뜻밖의 기회와 누군가의 호의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할 수도 있는 가능성으로 채워져 있다. 삶의 변화는 선형적이지 않았고 늘 계단과 같았다. 한 계단의 끝에 또 다른 계단이 있을 것이라는 의외성을 기대하며 고단했던 하루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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