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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fom Oct 18. 2023

제한된 합리성의 확장

#혼(婚)

  전통적 경제학에선 공개된 모든 정보에 기반하여 참여주체 모두가 합리적이며 이를 바탕으로 만족을 극대화하는 판단과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이는 실상에선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허버트 사이먼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지적 능력의 한계를 반영한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과 '최소 만족(satisficing)'이란 개념으로 '7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우리는 자신이 알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만족한 수준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연애를 하고 또 결혼을 한다는 것은 결국 의사결정의 문제이다. 단순하게 물건을 하나 사는 것도 의사결정의 문제라고 한다면 유사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서로에게 이끌려 자연스럽게 연애가 시작된다면 이런 비교는 의미가 없을 테고 사람과의 만남을 물건 사는 것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지만 현시대에 물건을 사는 과정을 한번 살펴보며 어떤 유사점이 있는지 그냥 한번 상상해 보자.


  물건을 사기로 결정하면 우선 인터넷으로 비교해 보고 여러 조건을 따져본다. 그러나 그 과정이 그리 편하지만 않다. 배송비, 쿠폰 및 카드사 할인 등 여러 변수들을 고려하다 보면 내가 얼마나 더 싸게 사겠다고 이 짓을 하고 앉아 있나 하는 현타가 오곤 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비싸게 사는 건 억울할 것 같아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비교 후에 이만하면 더 싼 조건이 나오더라도 그다지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시점 즈음에 결제를 해버린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아무리 인터넷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다 볼 수 있다고 해도 해외 직구까지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정보를 고려하여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을 테니 한정적인 정보하에 합리적 판단을 한 것이라 생각하고 만족하자고.


 어떤가? 유사한 측면이 있는가? 물건은 그냥 물건이기에 구매까지 이를 수 있지만 과연 내 인생을 걸어 함께할 사람을 만나는 의사결정도 위와 같이 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젠가 이상형을 만나 꿈에 그리던 결혼을 빨리 하기를 원했던 나도 취업 후 누가 정했는지 모르는 결혼 적령기를 지날 무렵 어떻게 해야 할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누군가를 만날 수는 있는지 결혼은 할 수 있는지 아니면 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끄는지도 잘 모른다는 공학용 계산기를 가방 속에 하나씩 넣고 빈 공터에 둘러서서 자판기 종이컵으로 컵 차기를 하던 친구 녀석들과 나는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패셔너블한 옷차림으로 여학생들과 함께 캠퍼스를 누비던 상대(商大) 녀석들을 부러워하기도 했고 시기하기도 했다. 수업을 들을 때도 과제를 할 때도 심지어 밥을 먹으러 갈 때도 그들은 무언가 온전한 세상 속에 자연스럽게 살며 행동하고 있었고 우리는 캠퍼스 구석에서 주어진 일들만 묵묵히 해야 하는 무언가 모자란 인간들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연애를 책으로 배운 사람처럼 어쩌다 읽게 된 교양 수학 책에서 답을 찾았다.


 ㅇ 최선의 선택(1/e-law of best choice)

 - (시점) 확률 통계의 관점에서 100명의 사람을 만난다면 몇 명의 상대를 만난 후에 선택할 것인가?

  • 물론 내가 선택했다고 상대도 나를 선택할 것이라는 낮은 확률은 고려하지 않음

 - (조건) 100번의 소개팅에서 딱 한 명만 선택 가능

  • 너무 일찍 선택하면 나중에 좋은 사람을 만나지도 못할 가능성 상승

  • 너무 늦게 고르면 남은 사람 중에 골라야 하는 위험 증가

 - (결정) 37명까지 만나보고 그전에 만났던 37명의 상대중 가장 괜찮았던 사람과 같거나 그 보다 나은 사람이면 무조건 선택

  • 자연 현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자연상수 e(2.718)을 활용, 기준점은 100/e = 0.36787944117 (약 37%)


  확률 통계상 수리적 판단을 해보면, 100명을 만난다는 가정하에 37명까지는 만나봐야 적어도 내 맘에 드는 사람을 고를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그래 열심히 소개팅이라도 해봐야 후회 없을 테다~! 내가 맘에 들어하는 상대가 나오기도 그렇지 않기도 했지만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고 연속 10번에 가까운 의욕적 소개팅에서 쓴맛을 본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인위적으로 만나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그렇게 정규분포에서 나는 소위 평균값이 아닌 아웃라이어(outlier)라는 생각이 들며 가까운 시간 안에는 연애 나아가 결혼이란 건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가까운 지인으로부터 소개팅 제의를 받았다. 당시 나는 6주짜리 교육을 대전에서 받고 있었고 주중에는 수업을 듣고 금요일에 올라오곤 했는데 소개팅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고 꼭 해야 하나 싶었지만 딱히 주말에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만나보기로 했다.


 나 : 이번 주 토요일 0시에 홍대 앞 0번 출구 앞에서 뵙죠.

 소개팅 女 : 홍대 지리는 제가 잘 아니까 장소를 정해주세요.

 나 : 아 그럼 0000이라는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만나요.


  야외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는 데 한 여성이 다가와 앉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고 소개팅 주선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들어보니 지인 언니의 대학원 친구의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직장인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몰랐는데 모 회사에서 콘텐츠를 만든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좀 거리가 있는 카페로 가서 차 한 잔을 마셨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기로 결정한 이후, 홍대 앞 전철역에서 만나자는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하는 사람의 어떤 점이 맘에 들었는지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누게 되었는데 한 가지는 '너무 잦은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미처 전화를 받지 못했을 때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방송계통에서 일하시는데 연예인을 만나 보았냐? 누구는 어떠냐 등 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라는 점이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귀찮게 하지 않았고 전화가 되지 않으면 보통 문자를 남기거나 다시 전화를 하지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으며 연예인이나 방송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음에도 자꾸 물어보는 것이 싫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꽤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해야 하는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도 맘에 들었다고 했다.




  결혼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앞선 일련의 모든 과정과 경험의 제한된 상황하에 그 순간 최선의 판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며 이 세상에 이보다 나은 선택은 없다는 확신으로 하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경험과 판단의 양과 질이 현격히 낮은 상황에는 비교하거나 고려해야 할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판단이 쉬울 수 있다. 이 사람이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그런 감정도 사실 시간 앞에선 무뎌진다는 사실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타인의 결혼에 대해 아직 아는 바가 없어서 이기도 하다.


  결혼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정말 다양한 시각이 있겠지만 결혼 14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나에게는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기에 나는 강력히 추천한다. 가장 큰 이유는 제한된 합리성의 확장(The expansion of bounded rationality)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경험과 판단의 범위(boundary)는 일반적으로 시간에 흐름에 따라 선형적(linear)으로 증가하지만 결혼은 이를 일순간(binary)에 확장시킨다. 나의 삶에선 생각할 수조차 없던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배우자가 옆에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정말 커다란 행운이다. 만약 아이까지 함께 한다면 범위는 3차원 적으로 증가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겪게 되는 인생을 어른 입장에서 바라보며 그때의 나와 부모님의 생각까지도 읽게 되며 인생을 한 번 더 살아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연애와 결혼을 망설이는 분들에게 먼저 조언을 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먼저 나에게 물어본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만족이 아닌 완벽을 추구하기에 한 발 더 내딛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게다가 본인의 의사결정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으며 어떤 것도 무조건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 결정과 그에 따른 결과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한 번쯤은 자신의 운을 믿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벽(maximizing)이 아닌 만족(satisficing)을 목표로 본인의 경험과 판단을 신뢰하며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혀보는 것은 도전해 볼 만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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