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fom Oct 23. 2023

어른인척하는 어린이

#어린이

  초등학교 시절이었는지 아니면 중학교 때였는지는 명확하진 않지만 또렷한 기억 하나가 있다. 초등학교 친구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화장품 가게에 어머니와 함께 들어설 때의 입구 형태와 환하게 빛나던 유리 진열장 그리고 그 너머로 나누었던 대화들까지도. 필요한 화장품을 구입하기 위한 대화에 이어 자연스레 아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자식 자랑은 감추기 힘든 것인지 친구 어머니는 공부 잘하는 아들을 은근슬쩍 자랑하기 시작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끝내 내가 공부를 잘하는지를 묻고 말았다. 당시 어머니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그 세세한 내용까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리 자랑할 만한 수준이 아닌 성적에 어머니를 난처하게 해 드린 것 같은 죄책감을 느꼈던 것만 분명하게 기억난다. 


  직장생활을 하던 어느 날 점심 먹고 돌아오는 길에 회사 건물 1층에서 심리 상담 프로그램에 대한 홍보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큰 비용을 들여 직원들의 정신건강을 위한 센터를 오픈했는데 당시만 해도 심리 상담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시각이 우호적이지 않았던 때라 이용률이 저조했었던 것 같다. 담당자의 권유에 따라 혈류로 스트레스 지수를 측정하는 기기 앞에 앉았는데 결과는 굉장히 높은 스트레스 지수가 나와 다소 당황을 했었다. 그리고 가급적 상담받아볼 것을 권유받았다.


  나는 실제로 엄청난 스트레스에 놓인 상황 중에 있었고 정신을 잘 관리하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던 때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마음먹고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첫 상담에서 객관적인 심리 분석을 위해 다음 상담 전까지 테스트지를 작성해오라 했고 이어지는 여러 차례 상담을 통해 나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수 많았던 질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상담사: 그것이 상담자분께는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나: ??? (그러게, 이게 왜 나한테 중요한지 나도 모르고 있구나) 


  심리 테스트를 결과에 의해 분석된 나는 정해진 룰을 잘 지키고 해야 할 일을 꼭 완수해야 하며 타인과의 갈등관계에서 손해를 보는 것이 더 편한 사람인데 이는 기질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정해놓은 틀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규교육을 마치고 기업에 입사하여 정년까지 회사를 다니는 정형화된 삶의 진로에 맞추어져 있으며 특히 대기업 직장인이 그런 특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회사에서 부려먹기 딱 좋은 스타일이라는 것. 어찌 보면 자신만의 철학이나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이어지던 상담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 애썼던 학창 시절의 나를 떠올렸으며 그게 나의 의지인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누군가 하라고 정해놓은 길을 따르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다 잊고 있던 화장품 가게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담사는 내 이야기를 차분하게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상담사: 자녀가 있으시죠? 

  나: 네 있어요. 

  상담사: 자녀가 어떤 이유나 조건에 때문에 더 사랑스럽던가요? 

  나: 그렇지 않죠. 그냥 보기만 해도 예쁘고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워요. 

  상담사: 그날 상담자분의 어머님도 같은 마음이셨을 거예요.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때의 스스로에게 말로 표현해 보세요. 


  운을 떼었으나 나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어머님의 마음과 어린 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모두 너무 와닿아서. 어른인 척 살고 있지만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마음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마음을 본 적이 있는가? 귀신을 속여도 엄마는 못 속인다는 말은 엄마가 초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애쓰지 않아도 아이의 마음이 너무도 맑고 뚜렷하게 보이기 때문인 듯하다. 어른이 되어가며 마음을 하나씩 하나씩 포장하기 시작한다. 나잇값을 못한다는 핀잔과 어른답지 못하다는 핑계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보면 어른이 된다는 말은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어린이를 이해하게 되면서 영원히 어른이 될 수 없는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는 뜻인 것 같다. 가끔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지금 하는 생각이 어린 시절 했던 생각과 비교했을 때 그리 크게 자라지 못했다는 것에. 사십 중반을 지나 오십을 바라볼 나이에 어린 시절의 생각이 아직 나를 지배하고 있음에.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아이들과 책을 잔뜩 산 후에 차 한잔 할 생각으로 커피숍에 들어섰는데 노키즈존이라며 입장을 거부당했다. 아이들은 시끄럽고 주변에 피해를 끼칠 것이라는 그 편협함이 불쾌했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며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라는 것을 그들은 영영 모르고 살 것 같아 오히려 안쓰러워졌다.   

 

  아이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넨다면 그들의 말과 생각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것은 지금까지 몰랐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일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아름다움과 사회의 관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