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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Dec 17. 2021

나의 순성 친구들에게

안녕! 나의 순성 친구들! 

‘순성’은 여기 한양도성을 따라 한 바퀴 쭉 걷는 걸 말해. 알고 있으려나?! 

여기서 ‘순’이 ‘돈다’는 뜻이거든. 


얘들아, 기억나니? 우리가 중간 중간 딴 데도 많이 가고, 툭 하면 옆길로 세고, 

엄마 핸드폰이 영 시원찮아 길도 잘 못 찾고, 갔던 데 또 가고, 

그래서 시간이 좀 많이 걸리긴 했지만, 

우리는 성북동에서 시작했던 순성을 한곳도 빠짐없이 다 완성했단다.

남산으로, 숭례문과 흥인지문으로, 거기서 인왕산과 백악산으로…. 


문 닫는 시간을 잘못 알고 갔다가 늦는 바람에 숙정문 못 들어갔던 것도 기억나지? 

우리 그때 산길을 막 뛰어 올라갔잖아. 얼굴 벌개져서 숨 헐떡거리며 갔는데, 

결국 못 들어가고 말바위 안내소 앞에서 정인이 엉엉 울었던 것도 기억나니?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더 한양도성 안팎의 오래된 동네와 옛 길들, 역사적 장소들을 찾아 

참 부지런히 돌아다녔지. 그렇게 5년여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어.


나는 너희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어. 

집을 나서면 한 시간 반이 넘게 마을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또 마을버스 타고 도착해서는 

그러고도 몇 시간을 걷고 또 걸었잖아. 다리 아프다고 징징거려도, 재미 없다며 입을 쭉 내밀어도, 

엄마는 못 들은 척, 안 들은 척 가방을 건넸어. 


너희는 모를 거야. 

그때 맸던 그 싸구려 가방이 얼마나 작아졌는지를, 

종종대며 걸어가던 너희들의 종아리가 얼마나 단단해졌는지를….


너희를 집에 두고 갈 수 없으니 데려가는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은 했지만, 

사실 엄마는 너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처음엔 말이야... 

이왕 답사하러 가는 김에 훌륭한 문화재도 보고, 역사유적도 많이 알아두면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했지. 국보며, 보물이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들도 많이 있잖아. 

오래전 여기 살았던 사람들이 이 땅 위에 만들어놓은 그런 위대한 것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아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마가 위대한 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희들도 알잖아?! (ㅋㅋ)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너희가 살게 될 저~기 넓은 세상, 그 세상을 너희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엄마의 모습,

사실은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 누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더 잘 하고 싶어지잖아.

너희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불끈 힘을 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거든. 

그렇게 엄마와 함께 걸어준 너희들이 있었기에 답사도, 글과 그림도 끝까지 마칠 수 있었어.

(아직 책이 되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엄마 생각인 거고, 너희는 엄마와 함께 걸으며 무엇을 보았니?

그것이 너희들 기억 속에 어떤 형태로 남겨질지 너무도 궁금하지만, 

더는 묻지 않을게. (찔리는 게 많아서)


나의 순성 친구들! 

우리가 답사를 마치고 지하철역 종점(그땐 종점이었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은 어두워졌지.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줄 마을버스는 수십 대 다른 버스가 지나가고 나서야 저 끝에서 달려오곤 했어.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말이야.

지하철역을 방금 빠져나온 우리를 마을버스가 딱 멈춰서 기다릴 때도 있었잖아.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재빠르게 올라타서는 어두침침한 버스 뒷좌석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지. 

“이~야! 오늘 진짜 운 좋다! 버스를 이렇게 빨리 타다니, 완전 땡 잡았어!” 

그러고 나서 돌아보면 꾀죄죄한 행색으로 앉은 너희들 정수리에선 여전히 쾨쾨한 먼지 냄새가 풍겨오고, 

그제야 온몸이 노곤해지며 버스의 딱딱한 의자 속으로 가라앉았어.


엄마는 너희들이 무엇보다 그걸 알아주었으면 해. 

우리가 가지 않았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

딱 맞춰 도착한 버스에 피곤한 몸을 내맡기며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 같은 거 말이야. 

그것이 너희들이 살아가는 매순간마다 어떤 힘이 되어 줄 거라 믿는다.


정말로 고마워. 사랑해. 나의 순성 친구들!



- 2021년 12월의 끝자락에서 엄마 이호정이 쓰다



청계천에서(전태일다리) / 그림 이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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