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충청권 대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정보기술(IT) 전문가 A 부장.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한국 굴지의 IT 업체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았다. 평소 일하고 싶었던 회사였기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더 좋은 것은 지방을 떠나 서울로 이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교육 환경에 관심이 많았던 부인에게도 반가운 소식을 전해 줄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사안이 있었다.
회사는 정규직 채용에 앞서 ‘3개월 수습’이라는 인사 제도가 있다고 했다. A 부장은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수습이라는 제도는 신입 사원에게 적용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12년 경력자인 본인에게도 해당된다고 하니 찝찝하다. 망설이던 끝에 용기를 내 인사 책임자에게 전화했다.
그는 “죄송합니다만 제 개인적인 성과나 역량을 잘 알고 있잖아요. 수습 기간 3개월을 거쳐야 된다는 사실이 금방 받아들여지지가 않네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인사 책임자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회사 내규라고 했다. A 부장은 물러서지 않고 경력에 대해 계속 얘기했다. 인사 책임자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정말 예외적으로 수습 기간을 면제해 주겠다고 했다.
그다음 연봉 협상이 있었다. 회사 측 제시 금액은 예상보다 낮았다. 지금 받고 있는 연봉 수준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다며 강하게 연봉 인상을 주장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는 A 부장의 요구도 들어줬다. 거기에다 부장 직위에 자녀 학자금 수당까지 지급하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연봉 협상까지 끝내자 인사 책임자는 물었다.
“이제 됐습니까.”
“하나만 더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서울로 이사하는 것은 저와 제 아내에겐 작은 일이 아닙니다. 아내는 현재 다니는 직장을 그만두고 판교 근처에 새 직장을 알아봐야 할 테고요. 그래서 말인데, 근무 시작을 한 달만 미뤄도 되겠습니까.”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더니 인사 책임자는 대답했다.
“그 문제는 조금 생각해 보고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면담이 끝난 후 회사에서 한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2주가 지났다. A 부장에게 한 통의 e메일이 날아왔다. 인사 책임자였다. 거기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한 대 맞은 기분이다. 회사가 그의 요구 사항 대부분을 다 들어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 풀려간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사실 근무 시작을 한 달 뒤로 미루는 것은 별것 아니다. 회사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입사 제의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A 부장은 그저 얘기를 한 번 꺼내 보고자 했을 뿐이다.
만약 즉시 근무가 필요하다고 요구했으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시기를 맞췄을 것이다. 왜 인사 책임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하지 않았을까. 궁금했던 A부장은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런 다음 인사 책임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알아봤다. 지인은 알아보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며칠 후 지인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상황은 끝난 것 같네요.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떠났더라고요. 연애할 때도 그런 식이라면 결혼 생활은 더할 것이라는 겁니다. 심지어 인사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채용해야 할 정도냐는 것이 그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일은 무산됐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론 A 부장은 그동안 다니던 직장에서 착실하게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가족과 여전히 잘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커리어에 큰 디딤돌이 됐을 좋은 기회를 날려 버린 것에 대해서는 크게 자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A 부장이 눈치가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맞다. 인사 책임자의 반응에 적절히 행동했어야 했다. 사실 남의 얘기이고 지나간 것이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얘기다. 비단 연봉 협상뿐만이 아니다. 협상을 하다 보면 언제 어느 때 적절하게 치고 빠져야 하는지에 대해 쉽게 답하기는 모호한 경우가 많다. 위의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협상 포인트를 살펴보자.
정보는 협상의 기본이다. 상대를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어렵다. 모른다면 물어봐야 한다. A 부장은 그래서 물어봤다. 근무 시작을 한 달만 미뤄도 되겠느냐고. 물어봐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해서다. 다만 질문의 방법이 좀 순진했다고 보인다. 이것에 대해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정리해 보기로 하자.
상대가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느냐다. 이걸 어떻게 파악하고 어디까지 밀어붙여야 할 것인가. 무척 어려운 부분이다. 협상 테이블에서 자신의 마지노선을 공개하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유일한 방법은 상대 제안보다 좀 더 나가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한 속도가 시속 100km인 고속도로에서 시속 105km로 달린다고 해도 속도위반으로 걸리지는 않는다. 운이 좋다면 시속 115km까지도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시속 120km를 넘긴다면 자신의 운을 과신하는 것이다. 운을 과신하게 되면 A 부장처럼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이때 노련한 협상가는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상대를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맞대응한다고 꼭 일이 잘못된다는 법은 없다. 다만 상대에게 뭔가 추가로 요구할 때 상대 또한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협상은 상호작용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상대를 마지노선까지 몰고 가려고 한다면 그로 인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헷갈려 한다. 요구를 욕구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 A 부장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자신의 커리어를 향상시키고 오랜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근무 시기 조정은 사실 ‘마이너 팩터(minor factor)’였다. 조그만 조건 때문에 커다란 가치를 놓친 셈이다.
나은 조건을 얻어내는 데서 오는 장점만 생각했다. 즉 요구 조건에만 얽매이다 보니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챙기지 못했다. 한 가지 더 생각할 점이 있다. 그것은 상대가 자신의 요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시각이다. 어쩌면 인사 책임자는 채용 시점에서 이런저런 근무 조건을 검토하고 조직 내 동의를 받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다른 직원들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결정된다면 형평성 이슈가 제기될 수 있다. 나중에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에 대한 부담도 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황에만 몰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에 꽂히기 마련이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의 양보가 필요하다. 상대의 상황도 동시에 고려하는 협상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만약 A 부장의 마지막 질문이 결렬의 원인이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았을까. 노련한 협상가는 부드럽게 유도 질문을 던진다. 이를테면 회사에서 제시한 조건을 그냥 수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꽤 괜찮은 조건이지 않은가. 그 정도에서 수락해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다른 선택, 즉 그 제안을 그대로 수락하는 대신 다른 조건을 붙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 그대로 하시죠. 그런데 근무 시기를 한 달 후로 늦추는 것은 어렵겠죠”라고 넌지시 조건을 슬쩍 걸어 보는 것이다. 그것도 가볍게, 그냥 지나치듯이…. 이것이 질문의 기술이다.
IGM의 한경비즈니스 칼럼을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