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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r 02. 2018

아일랜드 연가 15 - 눈 오는 날의 위선

눈 오는 날의 위선 / 2018. 3. 1

제목 : 아일랜드연가 15 : 눈 오는 날의 위선  2018. 3. 1


초등학교에 다닐때 겨울방학 한 달은 시골 외할머니 집에서 머물곤 했다. 할머니 집은 대청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있었다. 안방은 두개의 방이 이어져 있어서 중문을 열면 큰 강당처럼 넓어졌다가 중문을 닫으면 곧 이불속처럼 포근한 공간으로 둔갑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건너방이 있고 앞뒤로 창호문 두 짝이 있어서 독립된 느낌과 탁 트인 시원함도 느낄 수 있었다. 안방 옆으로 이어진 주방에는 작은 쪽문이 있어서 마루에 차려지는 밥상에 옮기는 음식이 드나들었다. 주방 옆으로 이어지는 사랑방에는 오래전에 외삼촌들께서 지내셨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지낼때는 온갖 먹거리들이 그 안에 가득 차 있어서 언니와 나에게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다. 광에는 고구마, 쌀, 무우, 마늘 같은 땅에서 자라는 것들을 보관하였고, 보물창고에는 콜라, 곶감, 말린 고구마, 강냉이 같은 할머니께서 만든 온갖 음식들이 사방에 나란히 앉아 있고 벽에 줄줄이 메달려 있는 것들도 있었다. 할머니 집은 처음 일주일은 도시 소녀들에게 한없이 넓은 모험의 세계가 된다. 뒷마당을 지나 끝없이 우거진 대나무에서 숨바꼭질 하는 것도 재미 있고, 마당에 쌓아 둔 볏짚을 한 가닥씩 뽑으며 내기 놀이를 하는 것도 신났었다. 하루에 한번은 20분 남짓 떨어 진 곳에 있는 ‘배못’이라 불리는 구멍가게에 다녀오는 것도 우리들에게 큰 일과 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면 여지없이 눈이 오고 밭과 논 사이로 평균대처럼 좁게 놓아진 길이 흰 눈에 쌓여 멋진 풍경의 수채화는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아니 시작도 하지 않은 하얀 도화지가 되었다. 어제 파 두었던 토끼굴도 없어지고 작은 돌을 쌓아 만들었던 마을 모형도, 작대기로 힘주어 그려 두었던 팔방도 눈속에 사라져 세상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변해 버렸다. 밤새 내린 눈은 아침과 함께 모든 것을 지워 버렸지만 그 모든 것을 잃어 버린 듯한 서운함 보다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만 같은 희망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엇다. 이상한 일이었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나는 사소한 모든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쓸모 없는 것들까지 끌어 앉고 사는 미련한 성격이었지만, 눈이 덮어버린 나의 창조물에 대한 애착은 아주 쉽다 못해 냉정하게 끊어버리곤 했다. 오히려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토끼 굴을 파면서 토끼가 진짜 이 굴에 들 어올 수 있을까 하던 걱정도, 언니것이 큰지 내것이 큰지 경쟁하던 마음도, 팔방을 하며 넘어져 아팠던 기억과 언니한테 지고 나서 올라 왔던 울먹임은 물론이며 옆집 언니와 편먹고 나만 따돌림 당하여 술래를 해야 했던 억울함도 몽땅 다 눈으로 덮어진 것 같았다. 없었던 일이 되는 것만 같았다.


하얀세상으로 뒤덮은 세상은 평온하고 고요했다. 몸 속을 가득 매우고 있는 노폐물이 다 빠져나간 것 처럼 가벼워졌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아침식사도 하기전부터 싸리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쓸어내셨다. 마루에서부터 시작되는 길은 마당 중간에 있는 화단까지 이어지고, 그 옆으로 장독대와 우물, 펌프와 빨래터까지 길을 내신다. 그리고 다시 길은 긴 곡선을 이루며 두 갈래 길로 나누어 진다. 하나는 화장실로, 다른 하나는 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한시간도 넘게 마당에 쌓인 눈을 홍해 가르듯 그렇게 가르고 나면, 마치 하루 일과를 다 마치신 듯이 큰 한숨과 함께 허리를 뒤로 끝까지 젖히시고 ‘아이고’ 하셨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눈만 빼꼼 내 놓은 나는 아직 내 발자국도 못 만들었는데 싶어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지켜보아야 했다. 그리고 좁게 가른 눈길과 그옆으로 더 높게 쌓인 소복한 백설기 같은 풍경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행이다 싶어 안도하였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시작되는 할머니의 걱정은 어린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이었다. 빨래를 밖에 못 널겠으니 방에 널어야 겠다는 것, 까치들이 먹을 게 없을 테니 잠시후 쌀 한 주먹 갖다 뿌려 줘야 겠다는 것, 아랫 집 노인네가 병원에 가는 날인데 버스가 안올 것 같다는 걱정과 미끄러워 마실도 못가겠다는 푸념까지. 소복히 쌓인 눈 위를 걸으면 뽀득 뽀득 소리가 나며 평소보다 덜 미끄럽다고 말 해 드려도 할머니는 들은체 만체했었다. 할아버지가 아끼시는 중절모를 눈사람에 씌워 줫다 할머니한테 혼나기도 하고 엄마가 모처럼 사준 빨강색 앙고라 벙어리 장갑을 눈사람 손으로 붙여 줬다가 잃어 버려 한참을 엉엉 울기도 했던 눈오는 날. 어른이 되고 나서는 할머니가 그러셨던 것 처럼 나 역시도 눈이 오면 일하러 가기 힘든 것부터 시작하여 아직 별로 쌓이지도 않은 눈이 녹으면 질척해 질 것까지 미리 당겨가며 불편한 것들을 나열하기 바빠졌다. 때로는 그런 나의 불평이 매우 이성적이고 어른스럽다는 생각까지 했다.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고, 눈 싸움 할 생각에 들떴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그리고 오늘, 더블린은 눈 주의보가 내려졌다. 십년만에 있는 일이다. 눈이 온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 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집앞에는 눈이 30센티가 쌓이고 버스를 비롯한 대중교통도 모두 중단 되었다.학교 휴교령과 내일 오후까지는 통행을 자제하라는 경고도 발표되었다. 런던에 잠시 다니러 간 아들은 항공편이 캔슬되어 올 수 없게 되었고, 서울을 출발한 아들 친구도 더블린에는 올 수 없게 되어 경유지인 영국에 주저 앉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더블린 집에 혼자, 그야말로 고독하게 지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리고 창 밖으로 펼쳐지는 눈보라의 향연을 감상하게 되었다. 식사 준비를 시간 맞춰 해야 할 필요도 없고 장을 보러 가야 할 필요도 없고, 지인과의 만남이나 볼일들도 모두 포기하게 만들어준 눈 오는 날. 이것은 도시에서의 고립임과 동시에 과거로의 여행같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노동은 물체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것이라 하더니, 그러한 노동을 위해 그동안 얼마나 불필요한 이동을 많이 했었는지 웃음이 나온다. 눈 조금 왔다고 해서 꼼짝없이 얼어 붙어버린 자동차 바퀴가 우스웠고, 그로인해 자신의 다리도 못 쓰는냥 움쩍도 않고 집안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또 얼마나 나약해 보이는가.

아침 일찍, 식빵을 사려고 집 근처의 작은 마트에 갔었다. 슈퍼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장을 보고 있었고, 진열대에는 평소보다 훨씬 적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빵이 진열되어 있던 복도 한줄은 텅텅 비어 있어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웃음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은 이참에 일요일까지 연휴를 지내게 된것에 기뻐하는 것 처럼 보였다. 옆집 아저씨도 비상사태 준비를 끝냈다며 마트에서 산 맥주 한박스 사진을 증거물로 페이스북에 올려 두며 껄껄대는 모습을 보였다. 거리는 자동차가 만들어지기 전인 19세기 이전으로 돌아 간듯, 차도와 인도는 구분없이 모두 흰색으로 덮였고, 그 거리를 오가는 것은 오로지 사람들, 몇마리의 개 그리고 바람 소리 뿐이다. 평소보다 하루는 훨씬 길어진 것 같다. 커피를 세잔을 마셨고, 토스트를 먹었고, 음악을 들었으며, 책을 조금 읽었고, 뉴스를 보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문학의 숲 연지당을 여행한다. 불편한 고립이 주는 고요한 날이다. 덕분에 시간에 따라 변해 버린 나의 위선도 확인하고, 어린시절의 추억도 되돌아보며 문명과의 차단이 주는 즐거움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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