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 Jan 12. 2021

자유를 찾아서 -1

아일랜드 사는 한국여자의 일상

아이리쉬가 나에게 묻는 질문과 대답, 

"왜 아일랜드로 이민 온 거예요?" 

"처음엔 이민이 아니었는데,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면 난 이곳에서 자유를 찾았으니까요!" 


자유를 찾아 이곳에 정착했다고 하면 바로 그들은 북한의 정치체제를 떠올리며 마치 나를 평양에서 온 사람 즘으로 상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실이다. 한국에 사는 동안 나는 나를 알지 못했다. 내 진심이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알고 싶고 도전하고 싶은 것들, 심지어 어떤 색을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내 스스로 생각할 자유를 억압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한국의 참고서와 아파트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곤 한다. 초등 학교 때 보던 전과, 중고등 학교 때 보던 과목별로 나눠진 참고서는 내 스스로 답을 찾는 방법을 마비시켰다. 내가 창조한 답은 옳은 답이 아니었다. 점수를 잘 받기위해서는 참고서와 가장 유사한 것을 적어 내야 했다. 반에서 1, 2등하는 아이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해야 모범생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 말씀에도 네네 하며 순응하여야 효녀다, 착하다 소리를 듣고 그렇지 못하면 어떤 식으로든 사회와 학교와 가정은 응징을 가했다. 나는 아주 작은 일탈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해터진 롤러스케이트장 한번 않가고, 만화방에도 가지 않았고 오락실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죄의 소굴이라고 생각했고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더러워진다는 상상을 하며 두려워했다. 

뉴로스 항구 / JF 케네디 가문의 고향

결혼 후 복도식 아파트에 살면서는 상황이 더욱 악화 되었다. 자신이 잘 침대를 사는데 이웃들이 두는 훈수 때문에 결국 더 비싸고 더 큰 침대를 선택하고, 아이들 유치원도 경쟁하듯이 더 시설이 좋은 곳으로 보낸다. 영어 그룹과외를 5명 묶어서 해야 저렴하다면서 졸라다는 이웃집 아주머니 성화에 하는 수 없이 아이를 그룹에 껴 넣기도 했다. 물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권이 있지만 그 후의 응징은 돈 몇 만원보다 훨씬 아픈 것들이었다. 프라이팬 하나도 볼 때마다 "글쎄, 저건 저렇게 휜다니까, 이왕 사는 거 명품을 사는 게 오래 쓰고 질도 좋지, 그러게 뭐라고 했어요 내가 전에 그거 하지 말라고 했잖아."하며 나의 판단오류를 질책하는 일을 반복하면 그야말로 그건 고문에 가깝다. 물건을 잘 못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는 그런 잔소리를 듣고 있는게 힘들고, 그렇지 않으면 이웃과 단절되는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이웃과 단절 된다는 것은 내 아이에게 친구를 잘라버리는 일로 연결되기 때문에 나는 내 의견을 무시하고 걸로 왕따 상황을 면제받은 것이다. 


신혼 초에 사원주택에 산 적이 있다. 그곳은 조경이 잘 되있는 정원과 잔디밭, 큰 고목들이 즐비한 외국의 고급주택가 같이 조성된 곳이었다. 월급쟁이들이 그곳에 처음 입주하면 전세금 뺀 걸로 약속이나 한 듯이 반짝이는 중형세단 자동차를 뽑았다. 내가 입주한 사택은 5층짜리 신축 아파트 건물이었다. 한 층에 21호까지 있고, 디귿자 모양으로 되어서 각 끝집과 코너 집은 21평, 직선방향에 있는 아파트는 18평이었다. 21평에는 3급 이상의 대리, 과장, 차장, 부장까지 살고 작은 평수에는 3급 미만의 평직원이 거주하였다. 평직원들 중에는 연세가 많은 분들도 있었다. 오히려 그런 분들이 더 많았다. 생산직 라인에서 일하는 분들은 대부분 5급에서 시작하고 십 수 년을 일해도 3급으로 올라가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했거나 또는 사무직 대리급이상으로 입사하면 바로 3급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오히려 코너에 있는 넓은 평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처사인가. 나는 남편이 경력직으로 입사하여 3층 끝에 있는 21호 집을 받아서 삼면에 창문이나 문이 있을 뿐 아니라 멀리 호수가 보이는 뷰까지 덤으로 얻었지만 뿌듯함 보다는 미안함과 부당함을 말없이 받아들인 것 같아서 수치심까지 들었다. 

제임스 조이스 / 나와 비슷한 나이에 고향을 떠난 영원한 망명자

그 아파트에 입주한 부부들 중에서 내가 가장 나이가 어렸다. 하지만 남편들의 관계가 있으니 다들 말할 땐 떨떠름한 표정으로 존대를 하였고 이이도 없는 젊은것이 코너 집을 차지한 것이 못마땅한 눈초리가 역력하여 부담스러웠다. 한 달에 한번은 반상회에 가야하고 또 복도와 계단 청소를 해야 하는 것도 부담되는 일이었다.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들과 부딪칠 때마다 새로 나온 탑파 통이나 면으로 된 침대보, 새로 나온 식기 건조기가 어떻다는 둥 그런 얘기를 듣기 싫어서다. 


결국 나는 몇 년 살지 못하고 그곳을 나왔다. 사택을 받으려고 줄선 사람들도 많은데 왜 이렇게 좋은 곳을 나가냐고 했다. 나는 졸지에 돈 귀한 줄 모르고 철없는 새댁으로 낙인 되었다. 그 집의 대문만 봐도 그 사람의 월급이 얼마이고 소비는 어느 정도하며 얼마만큼 저축이 가능한지 가늠할 수 있는 곳, 그래서 부장 와이프가 보험을 팔러 오면 꼼짝없이 내 가계부를 들킨 것처럼 잔말 말고 그녀가 팔고자 하는 상품에 도장을 찍어야하는 그 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맞벌이를 하면 돈을 좀 더 번다는 이유로 반상회에 수박을 한 통 사가야 하고, 그들이 원하는 곳에 지출을 해야 하는 것처럼 구는 태도와 생각에서 벗어나야 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했던가! 

호수섬 이니스프리 / 아일랜드 슬라이고 소재  Photo by JD JOO

그렇게 시작된 나의 리얼 아파트 생활, 사택 생활이 미풍에 떠는 추위였다면 서울 근교의 아파트 생활은 수영복 바람으로 겨울 태풍에 노출된 모양새였다. 각기 다른 도시에서 모여든 비슷한 나이 또래의 부부들과 아이들이 거주하는 신도시의 아파트는 날이 갈수록 남편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내 자신마저 쭈그러트리는 마력을 가진 곳이었다. 같은 엘리베이터와 경비실을 사용하는 우리들은 하고 싶지 않아도 비교하고 분별하기 너무 좋은 환경에 벌거숭이처럼 노출되어 있었고 그런 폭풍을 견디기에 나는 너무 유약한 멘탈을 가지고 있었다.  


수년이 지난 후 엄마가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이런 부정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만들어 졌는지 몰라도 같은 층의 아파트 주민들조차 서로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로 변해 있었다. 평수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내부 구조도 다르고 철저하게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형태다. 3주를 지내면서 단 한 번도 이웃을 만난 적이 없으니 완벽한 자기 공간 존중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차단인가? 이렇게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자유를 얻은 것인가! 


그래서 결국 당신은 자유를 찾았나요? 

예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사회, 타인의 소유에 대해 훈수 두지 않는 분위기, 상대평가나 유행에 둔감하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곳에 오래 살다보니 그제야 물 풍선처럼 물렁물렁했던 내가 단단한 정구공이 되어 원하는 곳으로 통통 튀어 갈 수 있게 되었다. 고요히 정적이 감도는 무채색의 공간에서 드디어 나는 내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고 내가 좋아하는 색을 집어 들 수 있었다. 내 안의 소리를 잘 듣고 믿으며 실현하는 것이 자유의 시작인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 사느냐가 준 해답은 아니었다. 다만 나처럼 줏대 없고 지나친 이타정신의 소유자라면 그 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 것일 뿐. 


#자유 #여행 #이민 #아일랜드 #한국여자 #외국생활


 



작가의 이전글 책리뷰-영원한 청년 권순영 판사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