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의 압도적 비주얼

그래픽 레트로 퓨처리즘의 명암(明暗)

by Gil

Bungie의 신작 익스트랙션 슈터 게임 <Marathon>은 90년대 클래식 명작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면서, 전 세계 게임 업계와 디자인 커뮤니티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브랜드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흔해 빠진 밀리터리 톤이나 어둡고 칙칙한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 Graphic Retro Futurism이라는 독보적인 톤앤매너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사이버펑크와 인더스트리얼의 결합

형광빛이 도는 애시드 그린은 전통적 SF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 고도로 발전된 사이버네틱 시대의 차갑고 정교한 느낌을 준다.




세로로 길쭉하고 굵은(Condensed & Bold) 형태의 타이포그래피. 알파벳의 둥근 곡선을 배제하고 45도 각도로 모서리를 깎아내어, 우주선 화물이나 군사 장비에 찍혀 있을 법한 스텐실마크를 연상시킨다.

오른쪽 상단의 원형 마크는 94년 원작 <마라톤> 시절부터 이어져 온 상징적인 로고가 이스터에그처럼 적용되어 있다. 또 하단의 작은 텍스트들은 컴퓨터 터미널이나 코드를 연상케 하는데, 타우 세티는 원작의 배경이 되는 행성계이다. ‘죽음은 첫걸음일 뿐이다’라는 문구는 플레이어가 죽어도 클론(Runner)의 몸으로 계속 부활하는 게임의 세계관을 관통시킨다.




아시아권 로컬라이징

일어와 한문은 완벽하게 이식된 것 같이 보이나, 한국어는 너무 아쉬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로고가 가진 조형적 특징을 적용하긴 했지만, 영문 로고의 형태적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냥 벙벙하고 애매한 글자가 만들어졌다.

아마 외국 디자이너 눈에는 한글이 하나의 '그래픽 기호'처럼 보여 이대로 통과되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로컬라이징 과정에서 한국인 타이포그래퍼의 검수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오리지널 로고의 사이버펑크적 느낌은 살리되 한글 뼈대에 맞는 훨씬 멋진 레터링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글은 가로, 세로 모두 정렬이 맞지 않는걸 볼 수 있다. 차라리 이럴 때는 MARATHON을 메인처럼 보이게 하면서, 로컬라이징 언어를 작게 적용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디럭스 / 스탠다드 에디션 아트워크

모듈형 그리드 시스템

마치 디자인 매거진의 펼침면을 보는 것 같다. 좌측에는 강렬한 네온 그린의 타이포그래피 블록을, 우측에는 십자선 마크와 함께 게임 내 스킨, 아이템을 그리드에 맞춰 배치했다. 이는 스위스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의 엄격한 그리드 시스템을 게임 아트에 끌어온 아주 세련된 방식이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커버

오비 스트립과 테크노 미학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좌측에 세로로 배치된 네온 그린 띠이다. 이는 일본 음반이나 책에서 자주 쓰이는 오비 스트립(Obi-strip) 형태를 차용한 것으로, 메인 아트워크를 가리지 않으면서 앨범 정보와 로고를 세련되게 전달한다. 글리치 효과가 들어간 기괴한 얼굴이나, 해부학적인 메카닉 렌더링은 90년대 테크노 앨범 커버를 연상시킨다.




Weapon Charms 카탈로그

인더스트리얼 제품 카탈로그

게임 내 아이템을 보여주는 방식이 정말 새롭다. 마치 무인양품이나 하이엔드 전술 장비 업체의 온라인 카탈로그를 보는 것 같다.




키아트

익스트랙션 슈터 장르 특성상, 플레이어는 다른 플레이어 뿐만 아니라 행성에 존재하는 외계 괴물과도 싸워야 한다. 상단의 거대한 붉은 그림자는 타우 세티 행성에 도사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환경적 위협을 암시한다. 하단엔 하이테크 전투를 보여주며 게임의 두 가지 텐션을 한 번에 전달한다.




80-90년대 일본 메카닉 애니메이션이나 레트로 우주복 디자인에서 강한 영감을 받은 캐릭터 디자인을 보여준다. 사이버펑크 하면 흔히 떠올리는 '비 오는 어두운 뒷골목'이라는 느낌에서 벗어난, 아주 밝고 멸균된 듯한 환경이 등장한다는 점이 <마라톤>만의 독특한 비주얼을 완성시킨다.



<마라톤>은 흔해 빠진 밀리터리 슈팅 게임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다. 네온 그린 블록을 하나의 템플릿처럼 활용해, 어떤 비율의 포스터나 어느 비주얼에 붙여도 단숨에 <마라톤> 브랜드로 인식하게 만드는 고도의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시켰다. 게임 출시 전부터 시각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만으로 글로벌 유저들에게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례는 매우 드물거라 생각한다. 이렇게 멋진 결과물에는 씁쓸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ANTIREAL 디자인 도용

1. 변명의 여지가 없는 '복붙' 수준의 도용

단순히 영감을 받았다거나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알파 테스트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 독립 디자이너 ANTIREAL이 작업했던 포스터의 기하학적 그래픽, UI 텍스트 심지어 작업물 속에 몰래 숨겨두었던 밈까지 게임 내 데칼에 그대로 복붙한 정황이 드러났다.

2. 초기 대응의 아쉬움, 커뮤니티의 분노

사건 직후 도용 사실을 즉각 인정했지만, 퇴사한 아티스트가 무단으로 넣은 것을 걸러내지 못했다며 개인탓으로 돌렸다. 대형 게임사의 아트워크에 초기 검수 시스템의 치명적인 부실을 여실히 드러냈고, 글로벌 디자인 씬과 게이머들의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3. 법정 공방 대신 합의와 정식 크레딧 보장

대형 자본을 가진 기업이 시간과 돈을 무기로 인디 아티스트를 법정에 세우거나 입막음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지는 않았다. 2025년 12월 양측은 원만하게 합의를 마쳤다. 2026년 3월 출시된 게임의 공식 크레딧에 ANTIREAL의 이름이 Visual Design Consultant로 당당히 올라왔다고 한다. 어설픈 사과로 끝내지 않고, 아예 정식 컨설턴트로 영입해 정당한 보상을 챙겨주는 확실한 후속 조치를 취했다.



거대 게임사가 레퍼런스 수집이라는 명목하에 개인의 창작물을 얼마나 쉽게 착취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어두운 단면이다. 역설적으로 아티스트 개인이 자신의 저작권을 당당히 요구하고, 결국 대기업으로부터 합당한 보상과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낸 매우 의미 있는 선례로 남게 되었다. 게임의 아트 디렉션 자체는 매우 세련되고 훌륭하게 뽑혔지만, 기껏 잘 만들어 놓고 그 뼈대에 누군가의 피땀 어린 디자인을 무단으로 도용했다는 꼬리표를 달게 된 상황이 너무 아쉽다.



매거진의 이전글33원정대가 빚어낸 브랜딩 연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