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외계인의 시선으로 악을 응시하자 감각되는 소리와 냄새들
거리를 두어야 감각되는 것들이 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다.
나는 나의 얼굴을 그 누구의 것보다 떠올리기 어려워 종종 당황한다. 기를 쓰다 간신히 기억해봤자 어느 사진에서 본 희미한 형태(대부분 앞모습)일 뿐이다. 24시간 한시도 빠짐없이 동행하는 나와 가장 가까운 나는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자녀도, 배우자도(자녀보다는 덜 하지만), 원가족(마흔이 넘으면서 나아졌지만)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객관적으로(개인에게 객관이란 영역은 허락되지 않지만 근사치로) 평가하고 판단하기란 지독한 근시가 안과 테스트를 받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무능이다. 1cm 내로 보는 사물은 그 무엇이건 분간하기 어려운 법이다.
악도 그러하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우리는 악을 즐기게 된다. 나는 이것이 항상 소름 끼치게 신기했다. 범죄자의 만행을 비판한다고 외치면서 그 잔혹함을 전시해 쾌감을 제공하는 작품들을 우리는 끝모르게 나열할 수 있다(잔인하게 예를 들어볼 수도 있지만, 경건한 가톨릭 신자 멜 깁슨은 긴장하시라, 안 하겠다). 거리 감각을 잃는 순간 반전(反戰) 영화는 장쾌한 고어물이 되고, 성범죄를 고발하는 영화는 관객을 기소될 걱정 없이 강간을 즐기는 공범으로 만든다.
예술가가 어떤 주제보다도 악을 다룰 때 자신의 태도를 깊게 고찰하고 내용이나 기술적 측면보다 거리감을 결정할 상응하는 형식을 고민해야 함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악의 심연으로 내려가 두 눈을 부릅뜨고 견딜 수 있는 예술가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경지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처럼.
Zone of Interest(이익의 구역...? 무슨 이익이 있다는 거지?), 제목이 한참을 어두운 화면 중간에 일렁이다 사라지고도 신경을 긁는 불쾌한 음악, 혹은 소리는 계속된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영화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있던 나는 갑자기 잔혹한 장면이 전시될까 봐 긴장한다. 무려 3분 이상 긴 시간(3년 이상 고통받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떠올리면 이 3분의 긴장은 얼마나 하찮은가!)을 인내한 후에야 비로소 신경을 긁던 소리는 서서히 아이들이 조잘대고 새가 지저귀는 한가한 소리로 대체되다, 어느 강가의 이상적인 연둣빛 풀밭에서 한가로이 나들이를 즐기는 가족들의 모습이 비친다.
영화나 일상에서 수도 없이 마주친 장면을 두고 나는 낯선 기분에 시달린다. 왜지? 당혹스러워하며 카메라의 시선대로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거리감 때문임을 깨닫는다. 일상에서 나는 당사자로서 직접 경험하거나 행인으로 몇 초 들여다 볼 뿐이고, 영화에서 나는 대부분 숏 변화나 대사 강조, 생략 등으로 좁혀진 거리를 통해 이입하여 동참하길 초대받는다. 이런 거리로 삶을 지긋이 목도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카메라는 몇몇 예외적인 장면을 제외하곤 영화 내내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와 담장 하나를 경계로 생활하는 소장 루돌프 회스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을 응시(실제로도 집 안 곳곳에 초소형 카메라를 곳곳에 숨기고 스테프들은 철수하는 방식으로 찍었다고 한다)한다.
외계인이라면 최악의 악행을 곁에 두고 평화로운 가족을 이런 시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만들어진 도식 때문에 판단을 내려놓고 사태를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는 분노, 경악, 공감(?) 등 사정없이 침투하는 여러 감정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일 테니. 감독의 전 작품이 외계인에 관한 것임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이에 성이 차지 않은 감독은 혹시 지구인들이 어딘가에 이입이라도 할까봐 중간중간 장치들을 삽입한다.
헤트비히(회스의 부인)가 방문한 친정엄마에게 모든 중산층 주부의 꿈과 같은 저택, 그중 특히 잘 가꾸어진 정원을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꽃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감탄하는 그들은 인간 목숨의 가치는 알아볼 수 없다는 역설에 빠진다. 갑자기 카메라는 꽃들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잡아낸다. 내내 원경으로 사태를 관찰하던 관객의 동공 바로 앞에 멀리서도 보아도 가까이 보아도 아름다운 존재를 현시하자 이면의 악이 매직아이의 전경처럼 명백히 떠오른다.
네거티브 필름처럼 무채색의 빛으로만 드러난 한 소녀가 동그란 무언가를 땅에 놓아두는 장면도 등장한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긴장하던 관객은 맥락상 그녀가 유대인이 지나는 자리에 몰래 과일들을 숨기는 것임이 알게 된다. 한치의 빛도 허용되지 않은 삼경의 어둠 속에서 적외선 카메라로 잡아낸, 기를 쓰고 노력해야 간신히 허용되는 선(善)의 흔적도 관객에게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나치의 화려한 연회가 끝나고 회스가 회관을 떠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카메라는 시간을 초월하여 현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춘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다. 아무리 닦아도 깨끗해질 수 없을 듯한 콘트리트 방, 사람 살을 수없이 태웠을 화장 공간, 한때는 산 사람의 발을 감싸던 신발들이 산처럼 쌓인 무덤, 희생자 사진들이 빼곡히 붙은 복도. 이 다큐멘터리 같은 사실적인 시선은 본 적 없는 당시 담장 넘어 그곳이 당시 얼마나 끔찍했는지 추정하게 한다.
이 정도 되면 우리는 어디에도 이입하지 말고 명철하게 악을 응시하라는 감독의 요구에 멱살 잡혀 끌려다니는 수밖에 없다.
거리를 통해 시각 정보가 느슨해지니 감각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소리. 눈은 가릴지언정 귀는 가릴 수 없어 담장을 두고 아득하게 멀리서 소리가 들린다. 가장 고통받는 인간이 내는 절망의 소리, 그들을 끊임없이 쏘고 두드리고 태우는 절멸의 소리, 인간 주인 옆에서 복종하는 개가 짖는 소리, 소리, 소리들.
그리고 냄새. 실제 코로 들어오는 자극은 없지만 거대한 굴뚝에서 쉼 없이 타올라 퍼지는 살 태우는 연기는 후각 세포를 건드린다.
회스가 갑자기 구토한다. 그는 무엇 때문에 토한 걸까. 죄책감? 아닐 것 같다. 회한? 아닐 것 같다. 환멸? 모르겠다. 모든 것에 구토를 느끼던 어느 철학자처럼 인간 삶의 부조리를 감지한 걸까?
그는 계단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영화의 시작에서 보인 화창한 봄빛과 상반되는 어두운 곳으로. 그 심연은 지옥이지만 그는 그것을 모를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러, 그에게는 이미 인간이 아닌 이들을 절멸하고 가족을 사랑하러 내려갈 뿐이다.
화면은 꺼졌지만 소리는 다시 고조된다. 지금껏 아득히 들리던 아우성이 한꺼번에 응축된 소름 치끼는 소리가 이어진다. 견디기 힘들지만 견디는 것이 최소한 인간의 도리일 것 같아 나는 견딘다. 모든 것을 견뎠을 때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된다.
우리는 카메라가 현재의 아우슈비츠에서 회스에게로 넘어갔을 때를 기억해야 한다. 회스는 한참 카메라 쪽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내가 악을 보았으니 악이 나를 보아낸다. 완전히 이방인으로 악을 응시하자 그 시선이 나에게로 넘어온 것(때문에 등장인물들을 자신과 관련 없는 악마로 묘사한 몇몇 평론에 나는 꽤 놀랐다)이다. 지금껏 나름 착하게 살았다고, 적어도 자신은 악마는 아니라고 믿고 산 나에게.
곁눈질을 하니 거대한 장벽이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총성이 들리지 않는가? 지금 입은 저렴한 패션 아이템을 만들다 재봉틀에 손가락이 찔린 이들의 한숨은, 지금 마시는 쉐이크의 바나나를 따다 넘어진 어린이의 비명은, 싼 고기를 제공하려 옴짝달쌀 못 할 공간에서 갇혀 몸에 배설물을 묻히고 있는 돼지와 소들의 울부짖음은, 들리는가?
들리지 않는가,
그들이 듣지 못한 것처럼...?
같이 본 독일인 남편에게 물었다.
“당신이 저 시대에 태어났다면 저들과 달랐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어?”
현재의 선한 남편이 말했다.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