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온기

2025년 10월 13일 화요일

by 달빛라디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내린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으로 시작되는 가요가 문득 생각나는 시간이다.


며칠째 이어지는 가을비는, 창문을 스치며 낮게 내려앉는다. 여름의 폭우처럼 쏟아붓지도 않고, 봄비처럼 생명을 틔우지도 않는다. 그저 조용히, 그러나 묘하게 집요하게 세상을 적신다. 예전 어른들이 “가을비는 농사에 도움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자주 오는 걸까. 마치 할 말은 많지만,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이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기온이 부쩍 내려갔다. 둘째 딸이 장모님과 괌에 다녀오며 선물이라고 건네준 긴 남방셔츠를 꺼내 입었지만, 팔목이며 어깨가 벌써 시리다. 결국 회사에서 받은 가을 점퍼를 덧입었다. 천천히 옷깃을 여미며 생각한다. 이제는 정말 따뜻한 음료가 필요한 계절이구나, 하고.


사무실 테이블 한켠에 고이 놓아 둔, 어쩌면 존재감조차 잃어버릴뻔 했던, 엄마가 연천 주말농장에서 캐온 돼지감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얇게 썰어 튀긴 탓에 따뜻한 물에 금방 차가 완성되었다. 처음엔 그저 궁금해서 마셨는데, 이제는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이 되었다. 컵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코끝을 간질이고, 구수한 향이 마음까지 데워준다. 커피의 쓴맛이나 단조로운 향과는 다르다. 돼지감자차는, 마치 흙냄새 섞인 바람처럼 투박하지만 진하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조용히 창밖을 본다. 회색빛 하늘 아래로 떨어지는 비는 여전히 가늘고 일정하다. 어쩌면 이 비도, 우리 삶의 어떤 시기처럼 쓸모없어 보이지만 꼭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눈에 띄진 않아도, 마음속 묵은 먼지를 조금은 씻어내주는 것처럼.


한 모금 더 마신다. 따뜻한 돼지감자차가 식도와 함께 온몸을 타고 퍼진다. 추운 날의 불빛처럼, 그 온기가 내 안을 채워간다. 문득 엄마의 이미 늙어버린 손, 강원도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딸의 미소, 그리고 농부에게는 정말 쓸 데 없지만 나에게는 위안이 되는 이 잔잔한 비소리까지 —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이 바뀌는 일은 이렇게 우리를 천천히 감싸 안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가을비는 그저 ‘쓸모없는 비’가 아니라, 내 마음에 불을 켜주는 조용한 방문객이다.


"보슬비는 소리 없이 오지만, 마음에는 분명한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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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로 만들어진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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