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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12. 2017

시지프스의 신화

시지프스의 노래    

                                                                            김한빈



  누구나 마음속에 산이 있다. 그 산은 세월을 쌓아올린 탑이다. 중년 고개를 넘어 쉰 살이 되면 어느덧 산꼭대기에 올라섰는지도 모른다. 공자와 같은 성인은 그 나이가 되면 천명을 알고 여생을 더욱 정진하겠지만, 평범한 일상인은 산꼭대기까지 간난신고 끝에 밀고 올라온 바윗돌이 저 산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굉음을 들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지난온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람들은 산꼭대기에 서서 번민하는 이마로 낯선 바람을 맞는다. 어떤 이는 빈손을 흔들며 허무의 숲 속으로 사라지고, 어떤 이는 고난의 신발을 벗어 놓고 계곡 아래로 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기가 온몸으로 밀고 올라온 거대한 바윗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산꼭대기에 정오의 해가 높이 떴다. 각성과 재생을 재촉하는 햇살이 뜨겁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산꼭대기에서 바윗돌을 잃어버린 일상인은 지나온 삶을 되돌아 볼 것이다. 시인 윤동주와 같이 ‘참회록’을 쓸 것이냐. ‘무엇을 바라 살아왔던가.’ 아프고 쓰라린 몸, 땀투성이가 된 얼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허무하고 허무하다고 삶을 포기할 수도 있다. 아니면 허무한 삶에 대한 자각에서 일어나 한 가닥 희망으로 절대자에 의지할 수도 있다. 경건한 신앙인으로 내세를 믿으며 이겨낼 수도 있다. 또는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면벽 참선하며 ‘이머꼬’ 화두를 잡을 수도 있다. 


  삶의 포기, 종교적 초월, 이것도 아니라면? 언 땅 위에 노래의 씨를 뿌리겠다던 ‘광야’의 시인 이육사는 ‘절정’이라는 극한적 한계 상황에 이르러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며 외부 세계와 단절된 내면 의식에서 비극적 초월을 꿈꾸었다. 


  한편,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산골짜기 아래로 굴러 떨어진 바윗돌을 찾으러 묵묵히 내려간다. 바윗돌을 찾아 다시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면 또 굴러 떨어질 바윗돌을 찾아서. 이것은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내린 가혹한 형벌이다. 바위를 밀어 올리고 다시 찾아서 밀어 올리는 일은 영겁회귀처럼 무한 반복되는 무의미한 노동이다. 프랑스 작가 카뮈는 여기에서 ‘부조리’를 발견한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이 부조리한가. 카뮈는 바윗돌을 찾으러 내려가는 시지프스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무의미성을 자각한 시지프스가 가혹한 자기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신들에게 반항하는 유일한 방법을 찾는다. 인내하는 것이다. 오히려 더 열심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카뮈의 해석에서 짙은 염세주의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끝없이 반복되는, 허무하고 무의미한 일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 일기 때문이다. 아무리 ‘반항하는 인간’이라도 결국엔 무의미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카뮈는 역설적으로 ‘창조’를 강조한다.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애써 밀고 올라온 바윗돌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 본다. 그 바윗돌이 ‘지금-여기’ 그대로 남아 있는지,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지 살펴 볼 수 있다. 여기 없으면 찾으러 갈 테고. 이제는 그 바윗돌을 낯설게 바라본다. 경이로운 감정을 품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세계는 얼마나 거대하고 경이로움으로 가득한가. 그 속에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연민과 공포도 품고서. 바윗돌은 어쩌면 인간과 인간의, 인간과 세계의 바람직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17세기 영국 성공회 성직자 존 던(John Donne) 신부가 쓴 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인용한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다./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생략) 땅은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만일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땅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다./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서 울린다.”



<오륙도신문>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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