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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12. 2017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            

                                                                         김한빈



  우리 사회의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하고 수호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고위직 파워 엘리트들의 불법 비리는 어떤 역사적 근원을 두고 있고,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현대소설 속의 두 인물 유형을 살펴보는 것이 해결의 실마리가 될는지 모른다. 


장면# 1


  일찍이 윤 직원 영감은 그의 소싯적에, 자기 부친 윤용구가 화적의 손에 무참히 맞아죽은 시체 옆에 서서, 노적이 불타느라고 화광이 충천한 하늘을 우러러, “이 놈의 세상, 언제나 망하려느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하고 부르짖은 적이 있겠다요. 이미 반세기 전, 그리고 그것은 당시의 나한테 불리한 세상에 대한 격분된 저주요, 겸하여 위대한 투쟁의 선언이었습니다. 해서 윤 직원 영감은 과연 승리를 했겠다요. 그런데…. 

                          -<중략>-

  “화적패가 있너냐야?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더냐……?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요,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넌 다 지내가고오……. 자 부아라, 거리 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제것 지니고 앉아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하략) ”           - 채만식 「태평천하」에서


  풍자소설의 대가, 채만식은 주인공 ‘윤 직원 영감’을 통해 일제 강점기에 대한 왜곡된 현실 인식을 반어적 기법으로 제시했다. 그의 부친 ‘윤용구’는 구한말 노름판에서 한 밑천을 잡고 지주가 된다. 그러나 화적패들의 손에 무참하게 살해된다. 이 화적패들의 일부 구성원엔 자신의 소작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작제의 모순은 극심해지고, 계층간의 갈등도 분출되던 시기였다. 화적패들이 그의 집에 들이닥쳐 ‘목숨이 중하냐, 재물이 중하냐?’라고 묻자, 그는 ‘재물이 중하다!’고 대답하고, 목숨을 잃는다. 자신의 생명보다 재물이 더 중요하다는 천민자본주의적 발상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를 ‘좋은 세상, 고마운 세상, 태평천하’라고 외치는 ‘윤 직원 영감’은 반민족 반사회적 친일 악덕 지주이다. 


장면# 2


  브라운씨 얼굴에 스텐코프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국무성에서 통지가 왔다는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으나 흥분을 억제한다. 미국에 가서의 일도 부탁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희망과 포부가 부풀어올랐다.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도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혁명이 일겠으면 일구, 나라가 바뀌겠으면 바뀌구, 아직 이 이인국의 살 구멍은 막히지 않았다. 나보다 얼마든지 날뛰던 놈들도 있는데, 나쯤이야…….' 그는 허공을 향하여 마음껏 소리치고 싶었다.              - 전광용 「꺼삐딴 리」에서


  한국사회의 엘리트 지식인들의 처세 교본이 될 만한 인물이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6.25 전쟁 직후까지 외세에 좌우되던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지식인이 생존하는 비법을 터득해온 의사 이인국 박사이다. 그는 자신의 기회주의적 변절자의 삶에 대한 반성은커녕 오히려 뛰어난 처세술로 성공하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지식인의 초상이다. 미군정 인사에게 국보급 고려 상감 청자를 선물로 바치고 미국 입국 허가를 얻고서는 희망에 부푸는 장면이다. 


  근현대사의 격변기에 겪었던 국권 상실은 시민 사회의 성립 기반인 사회 공동선에 대한 개념을 생산하지 못했고, 공공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도덕적 결함을 내포했다.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줄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영리한 지식인들은 국권을 회복하는 데 헌신하기보다 부정적 현실 상황에 부합하여 출세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금수저와 흙수저’, ‘기울어진 운동장’, ‘헬조선’이라고 풍자하는 젊은 세대에게 ‘윤 직원 영감’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태평천하’ 타령을 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국가가 있고 헌법이 있는데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가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세상, 이를 우리의 파워 엘리트들은 말한다, ‘태평성대!’.



<오륙도신문>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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