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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Nov 12. 2017

장자의 ‘윤편의 일화’

장자의 ‘윤편의 일화’

                                                                김한빈



  장자(莊子)의 ‘천도(天道)’에 ‘윤편(輪扁)’의 일화가 있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桓公)이 당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목수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다가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내용입니까?" "성인의 말씀이다."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사람의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벌컥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윤편이 말하였다. "신의 일로 미루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 입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더 깎고 덜 깎는 그 어름에 정확한 치수가 있을 것입니다만, 신이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전수받을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책에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이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장자는 이 유명한 일화를 통해 ‘성인들이 남긴 경전이 결코 진리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향과 맥락이 같다.


  이와 같이 동양의 불교와 노장 사상은 언어의 한계를 지적한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불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은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이를 통해 표현의 한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진리’는 인간의 인식 범위 밖에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윤편’이 주장하는 ‘전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술과 ‘환공’이 읽는 ‘경전’이 갖는 성격의 차이에 있다. ‘환공’의 독서는 인간과 사회의 참된 의미나 원리에 관한 것이다. ‘윤편’은 장인이 오랜 경험을 쌓으면서 체득해야 할 기술과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나 도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범주의 오류’이며, ‘잘못된 유추의 오류’이다. 전자는 손이나 느낌으로 익히는 기술이지만, 후자는 형이상학적인 가치와 윤리로서 서로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진리나 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선인들은 이를 문자로 표현하였고, 이러한 노력의 전형적인 집적이 바로 ‘경전’이다. 이것은 후세 사람들이 진리에 도달하는 데 방향을 제시해 준다. 따라서 ‘기술’보다 더 관념적인 진리도 전수하고 전수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윤편’의 주장이 옳다면, 인류의 기술 발달은 불가능할 것이고, 지식이나 이론도 전수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문명 발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언어가 표현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지만, 사실과 진리에 대한 성실한 기록과 전수를 통하여 문명 발달이 가능했던 것이다.


  ‘언어는 표현되자마자 변질과 왜곡을 수반한다’고 헤겔을 말한다. 반면 ‘언어는 사고의 집’이라는 비유로 언어 없이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의 입장도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사고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를 매개로 사고 내용을 표현하면 원래의 의도와 달라진다. 왜냐하면 언어는 인간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인간적 범주에 한정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로 표현된 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행위를 포기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인간이 진리나 도에 대한 궁극적 인식에 도달하기 원한다면 위대한 선인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문자의 도움을 얻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오륙도신문> 칼럼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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