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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Feb 02. 2018

‘불가사의(不可思議)의 키스’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불가사의(不可思議)의 키스

-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김한빈



  중세 유럽 어느 지역(스페인)에 예수가 재림했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군중들에게 전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대제사장(교황)은 그를 체포해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예수는 감옥에 갇혔고 다음날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날 밤 대제사장은 예수를 감옥에서 풀어주면서 말했다.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마시오. 지금 백성들은 배불리 빵을 먹으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소. 내가 인간들이 죄를 저지를 자유를 완전히 박탈한 덕분이오. 하늘에 가서 하느님께 전하시오. 하느님은 인간을 과대평가했소. 하느님은 인간에게 악을 저지를 자유를 주어도 인간은 결국엔 선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인간은 그 때문에 무한한 고통을 겪게 되었소.” 예수는 아무 말 없이 대제사장을 껴안고 그에게 입맞춤을 하였다.


  이 이야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중의 한 대목(대심판관)이다. 재림 예수가 대제사장에게 건넨 입맞춤을 어떤 평론가는 ‘불가사의의 키스’라고 격찬했다.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그 속에 ‘신과 인간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예수가 대제사장의 말을 듣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선과 악을 둘 다 선택할 자유를 주었기 때문에 악을 저지르고 고통을 겪는 인간이 불쌍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지상의 절대 권력자인 대제사장이 모든 인간들에게 악을 범할 자유를 박탈하고 대신에 빵을 제공하는 통치방식을 수긍한다는 뜻이다.


  반면,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뜻은 대제사장과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록 악을 저지르고 고통을 겪어도 인간은 결국 회개하고 선으로 돌아올 것을 확신한다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예수가 재림한 의도가 그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통에 빠진 인간과 대제사장에 대한 깊은 연민의 키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반된 해석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일까? 작가의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사상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겠지만, 한편 작가의 사상을 미루어 역으로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과 인간의 문제’를 다룬 그의 대표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제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진리가 오른쪽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왼쪽에 서 있다면, 자신도 왼쪽을 선택하겠다고. 다시 말하면, 진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이 더 위대하다는 뜻이다.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이 「백치」라고 고백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 므이스킨 공작은 예수가 이 세속에서 산다면 어떤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여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불가사의의 키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답의 윤곽이 잡히지 않을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미완성 교향곡이다. 원래 이 작품은 ‘위대한 죄인’이라는 제목 아래 3부작으로 구상되었다. 1부에 해당하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탈고하고, 2부와 3부는 작가노트에 남아 있지만, 완성되지 못한 채 작가가 타계했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고 도대체 주인공이 누구냐고 불평하기도 한다. 맏아들 드미트리의 정열적이고 활달하고 박력 넘치는 배역이 셋째아들 수도사 알료샤보다 더 두드러지게 보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1부에서 알료샤가 별로 활약하지 않지만 2, 3부에서 주인공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 작품의 서사구조는 친부살인이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부의 주된 서술대상이 드미트리에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2부의 중심내용이 ‘돌아온 탕아’일 수 있다. 즉, 그가 존속살인의 누명을 쓰고 시베리아 유형을 당하고, 그가 회개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는 줄거리일 수 있다. 돌아온 탕아가 된 드미트리가 시베리아 유형소에서 막내 아우 알료샤에게 편지를 썼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친부살인의 범죄에 자신이 간접적으로 관여했다고. 유형의 형벌을 달게 받는다고. 이제 회개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이 정도까지 힌트가 주어졌다면, 신과 인간, 선과 악의 문제와 관련된 ‘불가사의의 키스’의 의미가 반드시 불가사의한 것도 아닐 듯하다. 독자님은 어떻게 해석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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