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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Feb 02. 2018

붓다의 탄생을 기리며

  붓다의 탄생을 기리며

                                                             김한빈



  신록의 계절이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벚꽃이 만개하던 봄이었다. 달력을 넘기자마자 눈부신 5월은 초여름으로 달려간다. 사찰 주변에 사월 초파일 석탄일을 경축하는 연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잔치집 분위기다. 어린 시절 이맘때 절간에서 앙상한 철사틀에 습자지로 연등을 붙여 만들던 기억이 새롭다. 밤이 되어 연등마다 환한 촛불이 밝혀지면 가족의 이름표가 달린 연등을 찾아 소원을 빌었다. 목탁 소리에 맞춘 그윽한 독경 소리가 법당을 가득 메운다. 


  우리나라 선불교의 전통은 화두에 있다. 소설「만다라」의 주인공 파계승 ‘법운’은 하나의 화두를 붙잡고 방황한다. 큰스님이 그에게 던진 화두는 ‘작은 새끼 새를 유리병 안에 집어넣고 키우되 새가 자라서 유리병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유리병을 깨지 않고 새도 죽이지 않고 새를 유리병에서 꺼내 훨훨 날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이다. 인간의 언어를 뛰어넘는 사고를 요구하는 간화선은 곧 불립문자를 요구한다. 진리는 그렇게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가 보다. 


  사실 진리는 의외로 단순하고 소박할 수도 있다.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모든 지식의 총화가 진리가 아니다. AI라는 인공지능이 더욱 발전하면 그 경지에 근접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이치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학습해 오지 않았는가.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인간 존재 방식에 대한 각성과 불교의 가르침인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실천하는 일, 바로 그것 아닌가. 앎이 인간의 언어로써 풀어 이야기할 수 없고, 인간의 사고를 초월한 어떤 것이라면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소용이 될까. 


  붓다와 동시대를 살았던 동서양의 큰스승들은 어떠했나. 중국 노나라의 공자는 제자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하였고 그 문답은「논어」에 기록되었다. 그리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변론(소크라테스의 변명, Apologie)」에서 스승과의 대화록을 남겼다. 붓다 생애 500년 후, 예수는 갈릴래아 호수 남쪽에서 그의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설교한 산상수훈(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이 전해 내려온다. 이들의 공통된 커뮤니케이션 특징은 구두 발화이다. 1:1 대화이거나, 육성으로 전달될 공간 속에 있는 한정된 소수와의 담화이다. 문자가 아닌 말로써 즉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쉬운 언어를 사용하였다. 가끔은 더 쉽게 뜻을 전달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의 수사법을 활용했겠지만은.


  붓다도 이와 마찬가지다. 말로써 의사를 전달하는 상황에서 위와 유사한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였으리라. 때로는 연꽃을 들어 보이기도 했지만. 깨달은 자에게는 가장 쉬운 언어를 사용할 용기가 허용된다. 잘 모르는 사람이 횡설수설하고, 엉터리가 억지주장을 중언부언하는 법 아닌가. 그리고 붓다의 깨우침과 종교 형식의 불교, 실제 불교계의 현실 실천, 이들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불교계가 탈신비화의 길을 가야 할 까닭이다.


  우리는 이제 붓다의 깨달음을 순우리말로 쉽게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필요가 있다. 라틴어로 씌여진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아직도 세계 각국의 신도들이 뜻모를 말을 중얼거린다면 이상한 일임에 분명하다.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을 발명하자마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그동안 성직자들의 독점물이던 종교적 진리를 대중과 공유했다. 인도 붓다의 언어를 중국의 구라마습은 자국문자로 번역했다. 우리의 세종대왕도 한글 창제 직후 불경 번역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쉬운 우리말로 옮겨진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을 독경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한문 그대로 읽어야 제맛을 느낀다고? 인도 원어도 아닌데!? 성서를 라틴어로 읽어야 제맛을 느끼는 것과 다를 바 뭐 있나?


  2,500년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인류의 큰스승 붓다의 깨우침을 전수하는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꽃피운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신록의 계절 5월을 맞이하여 온누리에 부처의 자비가 가득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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